목사는 [성경적인] 직분인가?
목사는 [성경적인] 직분인가?
  • 강만원
  • 승인 2015.09.13 00:0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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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만원 ⓒ <뉴스 M>

‘성경적인’ 직분의 뚜렷한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의 첫 장에서 나는 목사가 “성경의 원형적인 직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은근히 불평을 토로하는 형제들이 있어서 공개적으로 답변한다. 참을성이 없는 형제들을 위해서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목사가‘원형적인 직분’이 아니라는 말은 목사 직분이 그 자체로 비성경적, 또는 반성경적이라는 섣부른 단정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정통과 이단을 구별 짓는 절대 기준으로 통용되는 ‘성경적’이라는 용어의 정의부터 분명히 정립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적’이라는 말의 기준은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명시明示’ 여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온전히 부합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자의 기록 여부가 성경적인 기준의 정의라면, 성경이 완성된 1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종교적인 직분과 제도가 모두 성경의 일탈이나 왜곡으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첨단 기술의 발달과 함께 21세기에 만들어진 sns를 이용해서 역동적으로 선교하는 사역자에 대해, 그런 사역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성경적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었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더 이상 ‘성경적’일 수 없는 구약 시대의 흘러간 규범들, 예를 들면 음식물에 관한 율법이나 정결 예식, 절기나 풍습에 관한 옛 규범이 성경에 명시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의 문자에 천착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성경적’이라는 말의 바른 정의는 문자적인 기록 여부가 아니라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의 뜻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성경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흔히 사용하는 ‘성경적인’ 의미의 왜곡뿐만 아니라 용어의 지나친 남용이다. 목사나 강사가 강단에서 말할 때 그들뿐만 아니라 듣는 청중도 응당 성경적인 말씀을 전하고 듣는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인의 설교나 강연 제목에는 항상 성경 구절이 ‘인용문’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목사의 영적 권위’를 말하면서 줄곧 디모데전후서에 기록된 ‘나의 아들 디모데야’, 또는 고린도전서에 있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들을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인 화자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성경구절만큼 효과적인 도구가 없다.

‘나의 아들’이라고 명시한 구절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목사의 권위를 입증하기에 더 없이 좋은 proof-texting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 ‘아들’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었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섣불리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과 디모데의 특별한 관계를 모든 목사와 교인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사역자와 교인들 사이가 영적 부자관계라면 바울은 디모데 이외에 다른 교인들에게도 ‘내 아들아’라고 친밀하게(?) 불러야 했지만, 성경 어디를 뒤져봐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유인즉, 사도와 교인들이 영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이 구절은 세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합법적인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라는 의미일 뿐, 교회 안의 차별적인 계급을 정당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성경에서 적절한(?) 인용문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설교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성경적’이라는 말의 왜곡과 남용이 심각한 수준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목사라는 직분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성경적인 직분’으로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문제는 기록 여부가 아니라, 현대 교회의 사역자로서 목사의 역할이 성경의 가르침에 전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비성경적 또는 반성경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이다. 요컨대,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새로운 권력자로 대두된 개신교의 목사가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모습’에 합당한지 여부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 성경적인 직분을 결정짓는 뚜렷한 기준이 돼야 한다.

목사를 비롯한 모든 사역자에 대한 성경의 지침은 분명하다. 사역자로서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의 계명을 준행해야 하는 ‘주의 종’이다. 그렇다면 ‘주의 종’으로서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될 수 없다. 목사가 스스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높은 자’를 자처하는 한 목사의 직분은 결코 성경적인 직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집권자’는 권력을 쥐고 세도를 부리지만, ‘주의 종’은 작은 자를 섬기라는 주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낮은 자’가 돼야 되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 26)

본문에서 말하는 ‘크고자 하는 자’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가? 성경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 세상에서 크고 으뜸이 되려는 자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이방의 집권자’로되 결코 주의 제자로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주 안에서 큰 자는 주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이며, 순종하는 자는 모름지기 주께서 보이신 ‘겸손의 본’을 오롯이 지키는 자이다. 주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섬김의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던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목사가 성경적인 직분이 아니라는 날선 비난은 결국 오늘날 목사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섬김의 본을 보이기는커녕, ‘개별교회’라는 종교왕국의 제왕처럼 군림하려 들기 때문에 반성경적인 직분이라는 더러운 오명을 입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나 지배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그랬듯이 생명을 바쳐 교회를 섬기는 종이 돼야 하며,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라 희생이며 헌신이다. 목사로서 자기가 성경적인 직분이라고 말하려면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바라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적인 직분이 아니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겸손한 종의 자세를 저버린 목사에게 ‘반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성경적인 판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성경적인 직분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은 목사라는 호칭의 기록 여부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낮은 자가 되라고 명령하신 주의 계명을 기꺼이 지키는 순종 여부에 달려있다. 이를테면,주의 뜻에 따르는 자는 성경적인 직분이며, 주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반성경적인 직분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책이라면, 성경의 원저자는 응당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분 전문 번역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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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로 2015-09-17 12:04:30
꼭 이런 삐딱한 제목을 붙여서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뭐유?
개혁도 좋고, 혁신도 좋고 다 좋은데 이 신문은 별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을 위하 비판에만 치우친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
물론 성경ㅇ서ㅔ 벗어난 교회지도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강만원 당신이 해야 할일은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오만...ㅎㅎ

진목연 2015-09-14 08:59:13
목사는 성경적인 직분이 맞습니다. 장로도 집사도 다 성경적 직분입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할 사람들은 모든 "제자" 성도들이지만 그 중에서 목사가 맡은 일은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칠 사람이 목사지, 목사가 모든 행정이나 옛날의 제사장 같은 지위를 갖고 권력이나 명예를 차지하는 것이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사사기 시대에 왕을 찾았던 것처럼 지금 시대에는 각 교회에서 목사가 왕노릇 하는 이것은 성경과 위배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