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캔들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이제 스캔들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 김기대
  • 승인 2015.11.07 0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르네 지라르 별세에 부쳐

희생양 이론과 모방 이론으로 유명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가 미국 시간으로 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미국 스탠퍼드대는 4일 지라르가 학교 인근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지라르는 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탠퍼드대 등에서 50여 년간 현대사상과 프랑스 문학·문화를 가르쳤다. 그는 라캉과 데리다 등을 초청해 미국에 최초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소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인터넷 매체 <파테오스Patheos>에서 아담 에릭슨은 지라르의 모방 이론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통찰이라고 평가 했다.

모방과 희생양은 지라르가 평생 천착해 온 주제였다.  

우리가 욕망 혹은 열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혹은 가끔씩 모방적인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항상 모방적이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모방 또는 욕망은 끊임없이 타자를 지향한다. 명품백을 들고 싶은 이유는 가방이 탐나서가 아니라 모방의 대상인 '짝패'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짝패와의 모방 경쟁이 극에 달하게 되면 희생양을 하나 택해 폭력적 충돌을 피해간다.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 향하게 한다는 말이다. 희생 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들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인간의 욕망은 부조리를 덮기 위해 희생양을 폭력으로 희생시키는데 이러한 진실을 덮기 위해 낭만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반면 소설은 진실을 말한다. 그의 대표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내용이다. 여러 신화들에 등장하는 희생양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사회는 체제 유지를 위해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안정을 획득한다.

   
 

사회의 주류는 희생양을 폭력적으로 희생시키면서 희생양의 죄없음을 인식하면 안되므로  모든 부조리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면서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성서는 희생양인 예수가 죄없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문화의 기원>에서 주장했다. 지라르는 모방욕망과 희생양문화를 연구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모방적 경쟁상태와 그 결과를 지칭하는 말은 공관복음에서 스캔들(scandalon)로 나타나는데 예수는 스캔들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다.

모방적 경쟁관계를 거짓으로 무한히도 만들어내는 스캔들은 선망 질투 원한 증오와 같이 아주 해로운 독소를 퍼뜨린다. 그런데 이 독소는 애초의 경쟁자들뿐 아니라 이들 욕망의 강렬함에 매료된 주변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독소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라고 말할 때의 복음서 기록은 분명 사탄과 스캔들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

우리는 자기 이외의 것을 악으로 간주해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죄가 없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행동한다. 낭만적으로 순수한 내가 오히려 타자들을 악으로 만들고 있다는 스캔들과 같은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스캔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존재다. 예수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스스로를 십자가형의 증인들에 대한 스캔들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낭만적으로(순진하게) 피해가는 것은 거짓이다. <세상의 설립 이래 감추어진 것들>과 마주할 때 우리는 예수의 진실과 만나게 된다.

이처럼 르네 지라르는 성서의 철학적 인류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스캔들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소서.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