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입으로 장사한 예수
맨 입으로 장사한 예수
  • 지성수
  • 승인 2016.05.02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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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인간의 일 중에 가장 흥미가 있는 것은 '복수' 이야기일 것이다. 복수라는 주제를 빼면 인류에게 드라마는 사라진다. 그런데 인류사에서 복수라는 주제에 대해 철저하게 안티를 건 이가 바로 예수다. 그 뿐인가? 실천 가능한 면에서 전혀 제로나 다름없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했다.

옛날 이스라엘은 상벌의 율법과 속죄의 율법이라는 두 바퀴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중국에서 법가를 세운 한비자를 떠오르게 하는 상과 벌을 법으로 규정한 내면에는 '복수'가 흐른다. 율법을 지키면 상을 받지만 지키지 않으면 율법으로 복수를 당한다. 만약 한비자로 상징하는 법가가 이스라엘처럼 속죄의 율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면 동아시아 역사는 다르게 흘렀으리라. 

그러나 법가에는 영혼을 다루는 '제사'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을 잠깐 풍미했을 뿐이다. 상벌 기능이 제 아무리 훌륭해도 '제사'처럼 영혼을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다. 인간은 '복수'만으로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칠 때 중풍병자에게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말썽이 일어났다. 예수가 말한 대로라면 병이 든 것이 죄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도대체 병이 든 것과 죄를 지은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사실은 당시의 통념으로 볼 때, 병은 죄 때문에 생긴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중풍병자 자신도 '내가 병이 든 것은 죄 때문이다'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병자가 가지고 있었던 강박관념을 풀어 주기 위해서 단호하게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이야기인 것이다. 

자! 그러면 예수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 어떠했는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산다고 해서 실제로 살아가는 데 무슨 지장이 있거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장례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갖가지 번거로움을 마다 않고 결혼식과 장례식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인간이 사회에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예식장처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예수 당시의 유대인에게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정기적인 죄 사함을 위한 통과의례로 성전에 올라가서 재물을 바치는 제사제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나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교회를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이 있듯이 당시에도 생존에 급급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겨운 당시의 보통 민중들은 사제 계급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까다로운 규례와 법도를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윤리적인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즈음의 교회처럼 구태여 부흥회를 열어서 "당신들은 죄인이야. 알갔어?"라고 없는 죄의식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나는 회개한 필요한 죄인이다'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제사에는 제물이 따르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장 가문은 제물 때문에 '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기 마련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제사장 집안이기는 했지만 직접 제물을 드리는 제사와 상관이 없는 시골 깡촌의 사제들은 제사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방법으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야에 은둔해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엣센파가 바로 이런 경향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엣센파의 한 사람인 요한이 요단강에 나타나 물로 세례를 주며 죄를 사해주는 신상품을 개발했다. 사태가 이렇기 되자 제물 중에 가장 작은 제물인 비둘기조차 살만한 돈도 없었던 민중들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을 추종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세례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 세력의 제사 행위와 구별되는, 요즘으로 말하면 민중 의례적 표현인 셈이다. 돈 안 드는데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유대 종교계에 봉이 김선달이 된 세례 요한과 맨 입으로 죄 사함을 선포한 예수.

그러나 돈 받고 제사 지내주는 제사장 계급에서 볼 때는 요한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아니라 요단강 물을 팔아먹는 사기꾼인 셈이다. 요한 선달은 당시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제사장 중심의 유대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예수의 등장이 가져오는 파격적인 의미가 있었다. 요한이 물로 죄 사함을 주었다면 예수는 '맨 입으로' 죄사함을 선포했다. 예수는 율법을 지키기 힘겨워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마치 베를린 장벽을 허문 것처럼 용서하는 권세로 장벽을 허물어 준 것이다. 예수는 죄 사함의 근거를 제사나 세례라는 밖으로 드러나는 형식 대신 '죄 사함의 확신'이라는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믿음에 두었다. 

자! 이만하면 예수가 왜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했으며 어째서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 예수의 '죄 사함'의 권세는 '제사를 통한 죄 사함'이라는 제사의 전매특허를 가진 제사장 집단의 철 밥통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니 안 죽을 도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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