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낭만적 신앙'을 거둬라!
한국교회, '낭만적 신앙'을 거둬라!
  • 양재영
  • 승인 2016.06.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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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 '정의와 연민의 종교를 향하여' 강의 요약
텍사스 크리스천대 강남순 교수 강연회가 LA 향린교회(곽건용 목사)와 버뱅크 새길교회(박원일 목사) 공동주관으로 ‘정의와 연민의 종교를 향하여 - 종교의 미래, 미래의 종교'라는 주제로 열렸다. <미주 뉴스앤조이>는 강남순 교수의 두 번째 날 강의를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이전 시간에 종교가 역사적으로 ‘억압자의 역할'과 ‘해방자의 역할’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종교와 교회만이 ‘억압자’ 또는 해방자로 고착된 것은 아니다. 우리 개인 스스로도 이런 이중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소중함”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말할 때 기본적인 세 가지 조건을 말하고 싶다.

강남순 교수 (사진: 강남순 교수 페이스북)

우선, '개별성의 윤리'이다. 개별성의 윤리는 우리의 ‘얼굴’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얼굴’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독특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유일한, 대체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평화롭게 살아가는 시작이고, 종교가 지내야 할 중요한 윤리이다. 예수의 윤리는 바로 이런 ‘개별성의 윤리’였다. 인간이 숫자나 이슈로서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소중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바로 개별성의 윤리이다.

두 번째로,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사고이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디오게네스가 “당신 어디에서 왔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코스모스에서 왔다”라고 말했다. ‘우주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그것이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작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정의’가 적용되느냐가 다르다. 오늘날 ‘정의’는 국가적 경계 안에서 적용된다. 미국 안에서 ‘정의’는 미국이라는 지리적 영토에 근거해서 범주가 형성된다. 다음엔, 시민권과 영주권이 있는가, 아니면 ‘소위’ 불법 체류자인가에 따라 다르다.

제가 여기서 ‘소위’라는 말을 쓴 이유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불법’(illegal)이라는 표현을 ‘미등록’(non-documented) 이민자라는 것으로 변경하자는 운동이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지성인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했다. ‘불법’이라는 말은 그 사람들에게 이미 ‘범죄자’라는 시선을 주게 된다. 그런데, ‘서류미비’라는 말은 ‘아직 서류를 등록하지 않은 것’이다. 학자들이 쓸데없이 개념을 하나하나 따진다고 생각하지만, 단어 하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가치체계를 주입시킬 수 있다. 사소한 게 사소한 것이 아니다. 타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단지 그가 이 지구상에 거하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 말을 한 칸트는 “어떻게 하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미등록 이민자들의 아이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이 지구상 위에 거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평화사상이며, 예수가 간곡하게 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게 미국 안에만 적용되어도 미국은 지금과 아주 다른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시민’이라 할 수 있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개념이다. 코스모폴리탄은 '태어난 곳'에 의한 소속이 아닌, '태양아래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이 개념이 중요하다.

“당신은 어디 시민입니까?”라고 물을 때, “미국시민이다, 한국시민이다”가 아닌 “나는 코스모스, 우주에 속한 시민이다”라고 말하면, 모든 타자들이 같은 동료 인간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개념이 다른 사람들을 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부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켜줄 국가가 없는 난민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부각되고 있다. 전통적 방식의 국가적 경계 안에서만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중요한 가치들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가치들과 일치하는 점이 많은데, 이런 질문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낭만의 종교와 연민의 종교”

오늘 화두로 잡고 싶은 것은 ‘연민’(compassion)이다. 자크 데리다는 “연민은 인간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은 데리다는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리다는 분명 따스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잘 사는 것’이라는 웰빙(well being)은 기독교의 ‘구원’과 어원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하지만, ‘구원’은 한국에서 이해하는 ‘웰빙’처럼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혼자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통전적(holistic)으로 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들이 이러한 근원적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

연민은 ‘동정’(sympathy)과는 다르다. ‘동정’은 어떤 분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불쌍하게 여기고 함께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불쌍하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동정을 받는 사람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윤리적 위계’가 형성된다.

연민은 '함께'의 ‘com’ 과 '고통'의 ‘passion’을 합해 ‘함께 고통한다’는 의미가 있다. 철학이나 모든 학문들의 질문은 ‘인간이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가느냐?’인데, 이것을 종교적 표현으로 하면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구원은 한국의 부흥사들이 말하는 ‘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한국사회가 세월호 문제로 고통을 받았을 때 ‘참 안됐다’라고 느끼면 ‘동정’으로 끝나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낭만적 애도’라고 부르는 데, ‘낭만적’이라는 것의 문제점은 어두운 측면을 안보려 한다는 점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게 되면 결혼 후 큰 문제를 만날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낭만화된 이웃사랑’이 종교를 ‘탈정치화’ 시킨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 우리의 구체적 삶의 문제와 연계가 되지 않는다. 교회가 이웃사랑을 그렇게 많이 이야기 하는데, 이웃사랑을 제일 가로막는 게 교회인 경우가 너무 많다. ‘사실’은 파헤쳐서 비판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강남순 교수 강연회가 LA 향린교회에서 열렸다(사진: 강남순 교수 페이스북)

“구제와 정의는 다르다”

‘구제’(charity)와 ‘정의’(justice)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개념의 대표적 차이는 구제는 ‘왜?’를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홈리스에게 점심을 준다면, 그건 구제이다. 그런 구제활동은 중요한 덕목인데, 거기에서 끝나면 표면적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다. ‘정의’는 ‘왜?’를 묻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됐을까?”, “왜 우리 사회는 저들의 문제를 관심 같지 않을까?” 등을 묻는 게 정의이다.

저는 독일에서 3년 밖에 안 살았지만, 정의의 개념이 어떻게 제도화되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연민’은 ‘정의’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의만 가지고 연민을 할 수는 없다. 제가 모 신문에 ‘정의와 미소’라는 칼럼을 통해 말했지만, 정의만 가지고 외치는 사람들이 스스로 비인간화 시키는 경우가 참 많다.

우리가 정의를 이야기할 때 잃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우리의 ‘미소’이다. 타자를 보는 ‘따스한 시선’이 없으면 정의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자크 데리다가 ‘정의’를 이야기할 때 ‘환대’(hospitality)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환대’는 ‘미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데리다는 칸트와 갈라졌다. 칸트는 ‘정의’를 인간으로서의 ‘의무’로 봤으나, 데리다는 ‘환대’를 ‘의무’로 볼때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따스한 미소없는 환대란 인간에게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기 장례식 때 읽을 조사(弔辭)를 스스로 썼는데, 그것을 보고 마음이 울려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데리다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아들이 읽을 조사를 썼는데, 맨 마지막 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데리다)는 이 자리에 오신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당신들이 그에게 준 수없이 많은 기쁨을 생각하면서 기뻐해주길 바랍니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당신들을 향해서 웃을 것이다’(I am smiling at you from wherever I may be)라고 말했습니다.” 
(원문을 축약, 의역했습니다- 편집자 주)

그 한마디를 읽는데, 가슴이 울렸다. 왜 데리다는 정의를 ‘의무’로 바라본 칸트와 갈라섰을까?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고통' 함으로서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정의에의 열정을 가지도록 한다. 저도 많은 비판을 하는 사람으로서 데리다의 미소를 생각하게 된다.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따스함이 근거가 된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은, 내 속에 있는 ‘연민’과 ‘휴머니티’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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