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의존'과 영적 '자존'
종교적 '의존'과 영적 '자존'
  • 강만원
  • 승인 2016.07.06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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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배설물’을 버려라!


강만원 (<뉴스 M> 자료 사진)

성경은 신구약을 통틀어 66권(구약 39권, 신약 27권),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31,173절(구약 23,214절, 신약 7,959절)로 구성되었다. 이토록 많은 장절과 구문, 단어들로 구성된 성경 가운데 종교개혁 운동가 루터를 사로잡았던 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을 읽은 루터는 그 순간의 감동을 ‘탑의 체험’이라고 말하며, ‘깨달음의 순간’, ‘회심의 순간’, ‘구원의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로부터 ‘이신칭의’가 개신교의 제일공리로 우뚝 세워진다. 비단 루터만이 아니라, 성경의 특정한 구절이나 그로 인한 개인의 영적 체험이 자신의 신앙을 결정짓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위 정통 신앙만이 아니라 이단에서도 이런 경우를 흔히 만난다. 즉, 정통과 이단의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특정한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며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섣불리 해당 구절을 해석하며 의미를 단정하기 전에, 그 구절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와 모름지기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이는 바른 해석의 전제가 되는 '텍스트의 일관성'(totality)에 관한 핵심 사안이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의 ‘통전적인’ 일관성이 없이 특정한 구절의 ‘발췌 해석’이며, 자의적인 ‘적용’에 기인한다. 요컨대 성경 해석과 적용의 오류에서 수많은 이단이 발생한다. 성경이 다양한 구절과 사건들로 구성되었지만, 특별한 감동을 주는 구절이나 사건이 사람마다 다른가 하면, 같은 사람이라도 때와 상황에 따라 ‘감동적인 구절’이 변할 수 있다.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한동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웠던 시절이 있었다. 매우 견디기 힘들었던 상황에서 미처 숨은 속내를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은혜를, 도움을 갈망했던 때인 것 같다. 그때는 신약은 뒤로 한 채 구약에 깊이 빠져있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의 ‘신비한’ 능력으로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사역자’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은 뒤부터 큰 변화가 있었다. 그때부터 ‘신약’에 심취했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계명을 기록한 ‘사복음서’에 깊이 빠져들었다. 물론 성경의 핵심인 ‘사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구약이 단단히 뒷받침돼야 하며, 바울의 서신서를 비롯한 신약성경 전체가 어우러져 하나의 ‘대문맥’(macro-context)이 돼야 한다.

따라서 어디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특정한 구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음 구절이다.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주어가 예수이며 목적어는 ‘내 교회’다. 영역 성경을 보면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I will build my church...!

내가 ‘아르케처치’를 주창하는 배경도 사실인즉,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이 구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어가 예수이며 목적어가 내 교회(예수교회)라는 사실은 ‘교회’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성경적인 교회, 이를테면 참 교회는 목사나 어떤 특정한 종교인이 앞장서서 세우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며, 다스리시고, 섬기는 것이다. 그 교회는 결코 ‘사제 교회’나 ‘목사 교회’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머리’이시며 모든 성도가 ‘지체’가 돼서 오롯이 한 몸을 이루는 ‘예수교회’가 돼야 한다.

속속들이 타락한 한국교회, 의미와 가치가 완전히 변질된 한국교회는 예수께서 선언하신 '교회'의 본질과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성경적인 교회일 수 없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겉모습이 교회처럼 생겼다고 허투루 교회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예수가 없는 교회, 그리스도의 성령이 떠나시고 종교권력자들의 탐심과 정욕이 득실대는 '강도의 소굴'을 감히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한국교회의 심각한 타락과 쇠퇴에 대해서 말들이 분분하고, 나름대로 많은 대안들을 제시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말기 암 환자’에게 해열제 주면서 열 내리기만 기다리는 치명적인 ‘오진’처럼, 실로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짓이다.

진정 교회를 살리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교회를 세우리라”를 가슴에 새기고, 기존의 종교적인 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서 예수교회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 감히 사제나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인 양 ‘헛짓’하지 말고, 교인들을 그들을 추종하며 괜히 ‘헛심’쓰지 말라는 말이다.

개혁, 정화, 갱신, 혁명... 무슨 말을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지금의 사이비 한국교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가차 없이 목사(사제)권력을 타파해야 하며, 교인들은 즉각 ‘목사 의존 신앙’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즉각 치워야 하는 ‘배설물’(원어는 물론 똥이다)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종교주의의 더러운 산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락은 윤리나 제도의 지엽적인 문제 이전에, 특정한 종교지도자가 장악한 ‘독재 권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슴에 담아야 하는 ‘보배’는 이 같은 ‘신앙의 배설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영적 자존감’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인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서 마땅히 교회의 ‘운영 주체’가 돼야 한다. 예수께서 생명 바쳐 세우신 교회에, 예수께서 성도를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새 성전’에 예수와 성도 외에 다른 어떤 자인들 감히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단순히 새 언약의 백성에 멈추지 않는다. 성경은 신약시대의 성도를 일컬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선언한다. 덧붙여 말하면, 벧전 2:9의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의 정확한 의미는, 오늘날 목사처럼 마치 자신이 ‘교회의 황제’인 양 거들먹거리는 한 명의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존하신 왕의,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는 의미에서 성도로 해석해야 한다.

신약시대 성도 개개인은 이처럼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유대교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으며,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가톨릭의 교황이나 사제가 필요하지 않다. 다만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만으로 능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동시에,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새 언약의 백성이 이른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다.

이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성경의 진리이건만, 오늘날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올곧게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구약시대, 또는 중세 가톨릭 시대의 구습을 버리지 못한 채 헛되이 ‘목사’에게 맹종하고 있다. 단순한 무지를 넘어서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이며 불순종이다. 예수를 올곧게 믿는 자는, 그래서 바른 신앙을 지닌 자는 모름지기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자다.

목사 의존 신앙, 그것은 자신의 ‘영적 자존감’을 상실한 자의 비루한 맹신이며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임 신앙일 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의 무서운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여, 주께 당당히 나아가라. 주께서 당신을, 아니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들’로 세우시지 않았는가. 거짓 제사장인 목사를 따라가는 것이 소경을 따라가는 것과 정녕 무엇이 다른가. 소경을 따라가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오직 예수'를 따라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

당신의 내면에 ‘세미한 음성으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거룩한 비밀이며 유일한 길이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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