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지혜 V. 하나님의 지혜
세상의 지혜 V. 하나님의 지혜
  • 최태선
  • 승인 2016.07.31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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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기 전에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 나라 이해임을 강조한 제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우리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고 시공간에 갇혀있는 존재라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구별하여 모인 이세상의 그 어떤 거룩한 공동체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대적인 차별은 발생될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 교인 공동체는 답이 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나안 교인 공동체는 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매우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의 말이 사실일까요, 나아가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개의 글

먼저 두 개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자유를 주면 함정이라 얘기하고 작은 비즈니스를 얘기하면 돈을 못 번다고 얘기하고 큰 비즈니스를 얘기하면 돈이 없다고 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자고 하면 경험이 없다고 하고 전통적인 비즈니스라고 하면 어렵다고 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다단계라고 하고 상점을 같이 운영하자고 하면 자유가 없다고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면 전문가가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구글이나 포털에 물어보기를 좋아하고 희망이 없는 친구들에게 의견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들은 대학 교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지만 장님보다 더 적은 일을 한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들은 대답할 수 없다. 내 결론은 이렇다. 당신의 심장이 빨리 뛰는 대신 행동을 더 빨리 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대신 무언가를 그냥 하라. 가난한 사람들은 공통적인 한 가지 행동 때문에 실패한다. 그들의 인생은 기다리다가 끝이 난다. 그렇다면 현재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가난한 사람인가?"

이제 두 번째 글입니다.

"오 이 시대의 부자여, 나 너에게 이르거니와, 너는 터무니없이 부당한 멸시로 가난한 이들을 홀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니 필경 너도 알게 되려니와, 우리가 사물의 근본에 이르고자 할진대, 네가 가진 재물에 대하여 그들도 너 못지않게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차리게 되리라. 자연은, 아니 좀 더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들의 공통된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셨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리가 본디부터 더 나은 자로 태어났노라고 자랑할 수 없건만, 우리네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 아름다운 우애관계가 이 세상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이 분열을 낳고 이것이 가난을 불렀으며, 온갖 다툼과 모든 송사가 모두 이 탓이다.

이로써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께서 그야말로 냉혹한 말이라고 하신 '내 것', '네 것'이라는 말이 설명된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다른 사회계층이 생겨나서, 혹은 모든 것을 넉넉히 쓰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혹은 극도의 궁핍 속에서 기진맥진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또 바로 이 때문에 몇 분의 교황은, 만물의 기원과 만인을 향한 자연의 너그러움을 동시에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를 거부함은 곧 마땅히 그들에게 속한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음이라고 서슴없이 선언했다."

두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호소력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여러분의 마음에 어느 글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첫 번째 글은 지금 우리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중국의 기업가, 아리바바의 회장 마원의 말이고, 두 번째 글은 1226년에 세상을 떠난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 프란치스코의 말입니다. 마원의 글을 읽을 때에는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을 읽을 때에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여 저항하고 싶거나 현실성이 없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 V. 하나님의 지혜

한 마디로, 첫 번째 마원의 글은 세상의 지혜이고, 두 번째 프란치스코의 글은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지혜이기 때문에 귀에 쏙 들어옵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욕망을 거스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저항하고픈 마음이 일고, 옳다고 인정이 되는 경우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 글을 읽고 마음의 찔림이 있거나 공감을 느끼는 분은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 기운 분입니다.

마원 회장

오래도록 설교를 하면서 제 설교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쉽게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설교의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교가 어렵게 들리는 것은 그 내용이 듣는 이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듣는 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체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였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나면 당황하기 마련이입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 그런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의 욕망을 거슬러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은 설교에 있어서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들은 설교의 내용이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일치하거나, 자신을 너무 아프게 찌르지 않고 적당히 자극할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거나, 자신이 실천하기 어려운 변화를 요구할 때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게 되는 가장 편리한 자기방어기재가 바로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정신에도 자신이 익숙하게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 당황하게 되고 두려움이 밀려오기 때문에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도가 없을 때 그 사람이 가장 쉽게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묘수는 자신을 감추고 숨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기가 닥치면 눈을 감고 머리를 풀숲에 처박는 어린 꺼병이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을 지적하고, 한 번 더 강력하게 욕망을 거스르라거나 그 사람의 가치관을 깨뜨리려 한다면 그 다음의 반응은 분노로 이어집니다. 나름 자신의 논리로 그 새로운 도전을 꺾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 말을 하고 있는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논지의 요점을 벗어나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논지를 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도록 이스라엘이 참된 예언자들을 상대하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고, 익숙한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가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 되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의 지혜는 저항 없이 달콤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미련한 것이나 거리끼는 것으로 어렵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변죽만 울리다 마는 설교

인간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늘날 설교는 인간의 귀에 쏙쏙 들어올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습니다. 아예 개념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는 기복주의 설교가 자리하게 되고, 기복주의의 유치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위해서는 조금은 더 그럴듯해 보이는 '긍정의 힘'과 같은 기복주의의 변형인 설교가, 이성과 열정을 함께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좀더 교묘한 '고지론'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복음에 뿌리 내리지 않은 인간중심의 설교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에 각종 마케팅 기법이 적용되고, 심리학이나 인터테인먼트 기법이 더해져 발전된 현대사회에 어울리도록 합리적이고 근사한 설교가 만들어지고, 꿀단지를 찾는 파리들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오래도록 설교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 잘 하시는 분들을 찾아가 설교를 듣거나 그런 분들의 설교 테이프를 구해다 열심히 들었습니다. 물론 설교를 잘 하시는 분들의 교회는 상당 규모 이상의 교회였고,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었습니다. 배울 것이 많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혼자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나의 세계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나아가 그러한 세계관에 따른 삶을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임하고 세워지는 것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 콧물 뽑아내는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다르게 살 수 있게 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설교들은 진짜 좋은 설교가 아니라 사이비 좋은 설교들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시작되어 바르게 전개되지만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마는 반쪽짜리 설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존경받는 L 목사님의 은퇴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최고였습니다. 그분의 거의 모든 설교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명 설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들이 바로 변죽만 울리다 마는 설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은퇴의 자리에서 '다섯 가지 참회와 다섯 가지 감사 그리고 두 가지 기대'라는 글을 낭독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다섯 가지 참회 가운데 네 번째가 바로 바로 아래의 참회였고, 그것이 바로 변죽만 울리다 마는 설교에 대한 참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곧게 살아가지 못한 성도들, 교회 내 부유한 기득권층에 대하여 그들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해 회개를 촉구하고 예언자적인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일."

이 시대 필요한 것은 변죽만 울리다 마는 설교가 아니라 핵심을 찌르는 설교입니다. 위의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황금의 입'이라 불렸습니다. 전에는 크리소스톰이 단지 설교를 잘하는 분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위 글에서 보듯이 그는 '내 것', '네 것'이라는 말이 냉혹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급진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복음에 물을 타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톰이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도 과연 '황금의 입'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만일 존경 받는 그 목사님이 '황금의 입'이 되어 설교했다면 그처럼 많은 교인들이 몰려들었을까요? 그렇게 화려하고 명예로운 은퇴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정말 성도들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참회 이후 그분의 설교는 달라졌을까요?

성 프란치스코

진리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복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황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리의 욕망을 지독하게 찔러대는, 아픈 설교입니다.

실제로 가능한 지혜

이제부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로 대비했던 위 두 사람의 글의 실제 실현가능성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원의 말대로 '당신의 심장이 빨리 뛰는 대신 행동을 더 빨리 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대신 무언가를 그냥 하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의 말이 사실일 경우, 모든 사람들이 다 마원의 말대로 한다면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모두가 부자인 세상이 도래하게 될까요? 현실은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다 마원의 말대로 따른다고 해도 그 결과는 여전히 1%의 부자와 99%의 가난한 사람들이 대립하는 사회일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경쟁적인 사람들로 인해 오늘의 잔혹한 현실보다 더 잔인하고 매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마원의 말은 부자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멸시하려는 오만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부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빼앗은 것이라 생각하고 남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면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복음은 그런 사회가 가능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곳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 적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보편적으로 가능함을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2-35)

무리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과거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그 가능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무리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된다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결단한다면 우리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는,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원처럼 모두가 부자가 되려 한다 해도 모두가 부자인 사회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처럼 모두가 가난해지려 한다면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이 반드시 열립니니다. 세상의 지혜는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고 가능해보이지만 현실은 반대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는 처음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능한 온전한 지혜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응답하는 도구로서의 인간 이성

저는 특별히 이 글을 '가나안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써보았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오래도록 이성의 사용을 극도로 제한하게 만드는 억압 가운데 머물며 인내해왔습니다. 또 그 억압은 마음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성도들은 이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도록 극도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며 어리석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전보다 더욱 경원시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나안 성도들이 이런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어쨌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이성을 겸손한 마음으로 적극 활용하여 하나님의 '샬롬'이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꼭 이루어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그만큼 귀중하다는 의미) 그 이성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인간의 반응으로서 제대로 작동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성을 사용하십시요,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많이 생각한 후에 하나님의 지혜에 담긴 온전한 사랑을 더 많이 실천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 가나안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거룩한 분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날마다 자기부족을 더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모습을 보고, 멀리서 응원의 미소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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