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교회에선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남의 교회에선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 최태선
  • 승인 2016.08.30 01: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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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권사님

같이 동역하던 강도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식에 참여하여 강도사님의 부모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일 이후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목사 안수를 받으신 분이 간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문병을 갔다 다시 만나게 된 목사님의 어머니는 큰 교회의 권사님이셨습니다.

대화중에, 아드님이 목사가 되었는데 예배에 참석하여 아드님의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당연히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일마다 나가고 계시는 교회를 빠질 수가 없어서 저희 교회 예배에는 참석하실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아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한 번쯤 교회를 빠지셔도 상관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권사님의 입장은 너무도 단호했습니다.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 당신이 나가고 있는 교회를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심각하게 그런 태도가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마이동풍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목사님은 일본 선교사가 되어 저희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권사님은 저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교회로 교적을 옮기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목사가 되었으니 한 주 예배를 같이 드리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상식적인 권유였습니다. 하지만 자기 교회라는 울타리는 너무도 높았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자기 교회라는 철옹성 앞에서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권사님처럼 자기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비단 이 권사님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의 교회를 거의 절대적으로 신봉합니다. 자기 교회가 예배의 장소로서 우상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없습니다. 특히 조금 크거나 알려진 교회를 다니는 분들의 자긍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교인들은 그 교회를 떠나려하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을 살피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자기 교회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는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날 너무도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자기 교회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개교회주의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치명적인 해가 되는지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쌓아가며, 자신의 그런 노력에 도취되어,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상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자신이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복음을 오염시키고, 교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결코 인식 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자신의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다른 교회들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교회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말씀드리고 있는  이 권사님은 특별히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일 뿐입니다.

어떤 개혁교회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일이 다섯 번 있는 달, 다섯 번째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모두가 흩어져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거쳐야 하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개교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는 다르다는 자의식만을 함양하고 고취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그들의 자의식이 오히려 다른 교회들을 폄하하고, 자기 교회를 구별하여 높이 생각하는 이전의 개교회주의보다 더 심각한 개교회주의에 빠져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의 당당함은 교만함으로 드러났고, 가만히 자기 교회에 안주하던 다른 교회 교인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치와 연합은 멀어지고, 오히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구별이 개교회의 벽을 더 높이 쌓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도 다른 글에서와 같이 사랑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엉뚱한 길로 가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옳다는 자의식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잘못된 기록을 남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특성은 바로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권력과 탐욕을 좇고 있으면서도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과 식민지 정복과 같은 복음의 왜곡을 낳았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모든 일의 동인(動因)은 오직 한 가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언제나 틀린 사람들을 찾아내 그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정죄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무런 희생양 없이 옳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옳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더 큰 희생으로 섬김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곳입니다. 

성령과 사탄

성령은 모든 사람을 사랑의 띠로 묶어 하나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점점 더 큰 하나가 됩니다. 반면에 속이고 이간질 하는 자인 사탄은 사람들을 분열시켜 고립시킵니다. 일단 고립된 사람들은 사탄의 손쉬운 노리갯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사탄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말하는 의미는 사탄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늘 사람들에게 개인의 문제는 개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은 사실 사랑을 말살시키는 가장 현명한 수단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개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모두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개인의 문제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의 문제가 될 때 그것은 더는 문젯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칠 때, 그것은 문젯거리가 아니라 사랑거리 혹은 연합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은 위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속의 기회가 됩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자신이 아이보다 며칠 더 사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끝까지 돌보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장애는 분명 문젯거리이지만 그 장애가 아이와 엄마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가족 가운데 누가 병이나 사고를 당하면 사이가 멀었던 식구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런 문젯거리가 발생하면 그들은 단 번에 뿔뿔이 흩어집니다. 특히 그 문젯거리가 돈과 연관되는 경우에는 그 흩어짐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탄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사람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가 갈라지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 되려 하는가를 살피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개인에게도 분명하지만 집단의 경우에는 더욱 현저합니다. 국가간의 이해관계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이기적으로 움직입니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기적인 경향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다 가릴 수는 없습니다. 큰 교회가 버스를 운행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교인들까지 싹쓸이하는 모습은 그 한 예입니다. 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우월감을 가지는 것 역시 같은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예들은 수도 없이 많고, 교회 간의 그러한 단절과 경쟁은. 요즘 어느 분이 즐겨 사용하는 말처럼 '국기를 흔드는' 일입니다. 개인 간의 단절 역시 하나님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교회간의 단절은 더욱 심각한, 결정적인 파국을 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교회주의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악이며, 복음을 무익한 것으로 만드는 가장 파괴적인 우상인 것입니다.  

떠나는 교회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11:8) 떠나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순례자와 나그네'라고 지적합니다. 순례자와 나그네는 근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지닐 수 없고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그래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와 나그네는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여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베이스캠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나그네와 순례자들이 일시적으로 머물고 쉴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해주고, 그들이 계속해서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모든 나그네와 순례자들을 모아 정착하게 만들어, 불편함 없이 살게 하는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그네와 순례자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일시적인 쉼을 제공하는, 머물다 떠나는 일종의 쉼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떠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서는 곳곳에서 교회들이 하나의 집이며, 하나의 몸임을 말없이 강조합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에 베드로가 가고, 요한이 갑니다. 아볼로도 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갑니다. 교회가 하나의 집임을, 교회가 한 몸임을 그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초기 교회도 분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 안에 분파가 생겨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습니다.(고전1장 참조) 교회가 한 집이며 한 몸이라는 것을, 그래야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이며 한 자매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직접 세례를 주는 것까지도 삼갔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코자, 개혁을 말하고, 목사교의 폐해를 말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들은 분명 옳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주장하고 실천하려 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한 집이며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고, 떠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가 한 몸이며 한 집이라는 근본적인 이해 없이 어떤 개혁을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분열의 빌미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분파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교회 안에 진짜와 가짜, 건강한 교회와 건강하지 못한 교회, 건전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교회가 한 집이며 한 몸이라면 어떻게 한 교회가 자신들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교회를 구분하게 된 이유가 오늘날 교회를 떠나지 않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간의 성도들의 이동이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에서 건강한 교회로의 이동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에서 건강하지 못한 교회로의 이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머리 되심'이 살아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절대로 떠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머물다 떠나는 교회일 것입니다.(거기에는 당연히 목사도 포함됩니다.)

'안 나가' 성도

가나안 성도들은 본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절대로 떠날 수 없는 교회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떠남을 단순한 떨어져 나감이 아니라 복음을 회복하는 의미 있는 기회로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떠나는 곳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적극적인 도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급속도로 불어났습니다. 불과 120명의 성도들이 수만, 혹은 수십만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불어난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지게 됩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와해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와해된 것이 아니라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각지에 흩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새로운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그렇게 흩으심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살리고 수많은 다른 교회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흩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의 집임을,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떠나는 곳이 되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 가나안 성도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흩어진 가나안 성도들은 단순히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처럼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곳곳에 흩어져 생명의 싹을 틔워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머리 되심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교회들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가 되살아나고, 복음이 희망으로 세상에 다시금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새로 세워지는 교회들은 단순히 새로운 교회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교회들까지 살리는 성령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엄숙한 성령의 역사에 단 마음과 기쁨으로 참여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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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부모 2016-12-10 08:49:29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하는
어머니의 삶이 왜 질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본인이 소속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을 마치 철옹성이라느니, 다른 교회와의 상생을 포기하는 행위라느니, 죽은 신앙인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자기가 소속한 교회에서 맡은 바, 본분을 다하는 것도 성도의 좋은 모습입니다.
그것을 마이동풍이라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들 설교 잘하나 보러 가는 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비약입니다. 아들 설교 들으러 오는 게 좋은 예배자의 모습인가요? 굳이 가야 상식인가요? 오히려 아들이 목사로 시무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해당교회와 성도들에게 실례가 될까봐, 방문을 거절하시는 분들도 많음을 알려드립니다.
그것이 오히려 아들이 시무하는 교회를 사랑하고, 전체 개신교회의 하나됨에 더 유익한 길일수도 있죠. 기도로 중보하는 것으로 부족해서, 오지랖스럽게 우리 아들 잘하나?
마치 웅변대회 내보낸 부모의 심정으로 이 땅의 목회자 부모들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소속된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는 평신도라면, 그것으로 격려하고 축복해주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오히려 왜 본인 아들이 우리교회에서 목회하는데 한 번 예배를 안오느냐고 하는 목사님의 저의가 오히려 더 의심스럽게 들립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로의 편향되어가는 문제를 지적하시려는 바는 이해합니다.
다만 성실히 신앙생활 하는 이들의 모습이 매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그것은 좋은 해결방안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