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거지 목사입니다."
"저는 거지 목사입니다."
  • 최태선
  • 승인 2016.09.09 03: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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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목사

저는 거지 목사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낭만적인 표현은 더더욱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가진 것도 없고, 별 볼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수입도 없어서 딸과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이미 십 년을 넘어섰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한심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것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발악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든 존재를 알리고픈 마음에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정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무슨 목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더 아픈 질문으로 각색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아픕니다. 하지만 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중단했고, 요즘 저희 교회는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거지로서 부적격한 부분은 구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구걸을 하며 살아갑니다. 직접적으로 돈을 구하지는 않지만, 인정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명분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실상 속마음은 돈을 구걸하기 싫어 고상한 해결책을 찾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렇게 거지 목사가 되니 주변에 사람들이 없습니다. 외로움은 또 다른 가난입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어떤 가난보다 더 힘든 지독한 가난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점점 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게 되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저와 만나지 않으려 합니다. 비참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커질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기회가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계산하고, 연락을 하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정말 거지같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지 목사입니다.

기도의 응답

그러나, 정확하게 제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이 모습은 제가 오래도록 기도해 온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선택 앞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심하고, 오래도록 '가난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끄 엘륄의 가난의 정의대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그 상태가 되려면 가난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고, 다른 사람의 채무까지 더해져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집은 경매로 넘겨지고, 아무런 대책 없이 경매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로 제게는 이런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면, 그런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뭐냐고 따져 묻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하려는 일마다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니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혈연인 형제들마저 저와의 만남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큰 아이 결혼식 때에도 청첩을 보내지 않은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가난이 이처럼 무서운 것인지는 정말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시련을 주신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암담한 상황으로 빠지게 되고, 바닥이 어딘지 모르겠다던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 계셔서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말한 사막의 성자, 푸코의 말을 믿고, 아예 전향적으로 내려가 보기로 마음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닥은 끝이 어딘지 모르는 심연이었고, 주님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는 욥의 아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지금도 현재형으로 진행 중입니다. 죽음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4층에 살 때는, 창문을 열고 장중하게 아래를 내려다본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차를 몰다 절벽이 나타나면, 그냥 절벽 아래로 핸들을 꺾고 싶을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등산 중에 산에서 우연히 밧줄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죽으라는 것인가,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얼마나 힘든 것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떨어져 죽는 길

죽음이 얼마나 힘들 일인가를 알데 되자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생명의 역사를 장중하게 보여주는 간결한 문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숙명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가진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물론 죽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떨어져 죽는 길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길을 가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지기는커녕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철저하게 믿습니다. 거기에 약간의 희생이나 봉사를 하게되면 죽은 후에 받을 상급까지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가르치면서 지도자의 길을 걷는 목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장을 하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교인들 싹쓸이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습니다.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늘려가면서 많은 생명들을 오히려 죽이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런 자신들이 많은 영혼을 구원했다는 자화자찬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들에서 맺고 있는 열매들을 보십시오. 피고 있는 꽃을 보십시오. 그것이 과연 생명의 꽃이며 부활의 생명인가를. 생명의 꽃은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것이며, 부활의 생명은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놓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오직 떨어져 죽는 길을 가는 이에게만 이 생명의 역사는 시작되고. 꽃이 피어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그러나 엄숙한 진리의 길에서 떨어져 죽는 길을 걷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될 것입니다.(고전4:13 참조)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본 받는 사람이 되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면, 자신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간곡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떨어져 죽는, 생명의 길로 저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 보아도 저는 거지 목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감사합니다. 저를 거지 목사로 지칭한 것은 결코 자조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여 맺게 될 많은 열매를 바라보며 감격에 젖어있는,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확신하는 자기 정체성의 한 표현입니다. 앞으로 어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생명의 역사가 발현되어도 저는 거지라는 저의 정체성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먹을 곳이 있는 곳을 알게 된 거지로서, 다른 거지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일에 남은 생명을 불태울 것입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

제가 거지 목사라는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구태여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꼭 드리고 싶은 한 가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죽는 길에 들어서면 복음이 달리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생명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고, 복음이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서 실천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징하게 확인하게 된다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졸글들이 어쩌면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떨어져 죽는 길에 들어서는 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고 안내할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삶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존재로서 독특하게, 그러면서도 창조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여건이 결과적으로 선의 도구이며, 저항 없이 모든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게 하는 수동의 삶을 배우고 익히게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성서의 말씀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됩니다. 당연히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이해하는 폭 또한 넓어집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지고, 점점 더 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완성이 없는 길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끝없이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중간에서 아직 되도 않은 사람이 감히 가나안 성도님들에게 훈수를 둔 것입니다.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가나안 성도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졸글을 써보았습니다. 제가 쓴 모든 글들은 얼마든지 무시하셔도 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음에 다가오는 부분이 있으면 참고하시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를 꼭 기억하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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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6-09-11 22:05:45
목사님의 고백에 의문이 많고 따라하기 힘들겠지만, 어느날 그렇게 된다면 크게 힘이 될 듯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강진 2016-09-09 11:41:54
거지목사님! 파이팅입니다!! 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