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은 아픈 기독교의 상처
'에큐메니칼'은 아픈 기독교의 상처
  • 최태선
  • 승인 2016.10.06 0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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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뛰어난 신학자이자 추기경이었던 존 헨리 뉴먼은 원래 영국 성공회의 사제였습니다. 183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소위 말하는 옥스포드 운동이라는 종교 쇄신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그 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운동에 헌신하다가 가톨릭으로 진영을 바꾸어 추기경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된 이후에는 더욱 종파를 아우르며 진리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충실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뛰어난 지성과 올곧은 태도, 고결한 영성을 바탕으로 많은 청중과 독자들을 사로잡았으며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가 팽배한 현실을 우려하여 정치권력에서 벗어난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교회를 꿈꾸었던 그는 초대 교부들의 정신을 닮고자 부심했습니다. 정치권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교회를 꿈꾸던 그가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만큼 그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만큼 개신교인인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가톨릭 안에는 넓은 품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그는 열다섯 살의 회심 체험 이후로 줄곧 진리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든 그 진리를 따랐습니다. 그의 글들에는 그러한 그의 열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거룩함을 열렬히 추구하면서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행보에서 우리는 한 인간이 교리에 대한 충성으로 종교적 광신자들이 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무관심과 맹신의 안개 속을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전 존재로 흔들림 없는 신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뉴먼이 가톨릭 신자가 되자 그를 멀리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이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잃는 것이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비통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전적으로 믿으며 그 짐을 짊어졌습니다. 그런 현실을 그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기쁨을 주어 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이미 세상에 들어와 있는 빛과 진리를 끝내 찾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시련과 고통을 끝까지 이겨내자고 권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교회 일치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아들은 이라면 온 힘을 다해 추구할 수밖에 없는 아픈 기독교의 상처입니다. 복음의 완성은 '하나 됨'입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우주라는 피조세계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통일되는 것입니다.(엡1:10)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완성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일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교회 일치는 단지 어떤 사람들의 운동이 아니라 복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 가장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빛과 진리를 오롯이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도달하는 과정이며 목표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한다고 해서 모두가 뉴먼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말만으로 혹은 심적으로만 동의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는 진리에 대해 올곧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자신의 친숙한 모든 것, 자신의 발판 모두를 버린 것입니다. 그의 진지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며 그러한 그의 신앙과 삶에 대한 이해가 그의 기도에 오롯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주님을 향하는 온전함 그의 마음,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려는 그의 모든 삶,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것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정과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삶과 분리된 종교생활,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생활과 같은 일들은 애초부터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모든 소유, 그의 모든 시간은 이미 주님께 헌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향기가 되고 빛이 되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후퇴함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떨어짐으로써 올라갑니다. 우리는 고통당함으로써 정복합니다. 우리는 침묵으로 설득합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줌으로써 풍요로워집니다. 우리는 온유함으로써 땅을 물려받습니다. 우리는 슬퍼함으로써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참회하고 기도함으로써 영광을 얻습니다."

어쩌면 성서를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힘이 있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 그의 삶이 녹아 있고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그런 삶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삶은 온전히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삶대로 기도할 수 있었고, 그의 기도를 통해 그런 그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은 그의 모습, 삶을 통해 드리는 그의 예배,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이면서도 전혀 신학자처럼 기도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서 오랜 친구와 같은 친밀함을 느끼는 것은 모든 진리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씀으로 육화된 존재란 영원한 존재로 늘 현재형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아멘'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크게 울리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부족하고 용기 없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고마운 마음으로 그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되뇌어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뿌리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영혼이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흘러넘치게 해주십시요. 
저의 존재 속에 당신이 영과 생명으로 흘러넘치게 해주십시요. 

저의 존재 속에 당신이 들어 오셔서 완전히 소유하시어 
당신의 빛으로만 저의 삶이 빛나게 해주십시요. 

저를 통하여 제 안에서 빛나는 당신으로 하여 
제가 만나는 모든 영혼이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십시요. 

주님, 그들이 저를 통해 당신만을 보게 해주십시요. 
저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그러셨듯이 저도 빛을 내기 시작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대로,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밝힘으로써 
당신을 찬미하게 해 주십시요. 

제가 말로써가 아니라 
당신을 닮은 표현을 보임으로써 힘을 내게 하고, 
당신을 품고 있는 제 마음이 
동정심에 넘치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을 전하게 해 주십시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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