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영혼과 사후의 문제
죽은 자의 영혼과 사후의 문제
  • 박경은
  • 승인 2016.12.27 0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약성서의 윤회설적 개념과 연관하여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의 각 책들에 기록된 “죽은 자의 영혼과 사후의 문제”에 대한 내용들은 윤회설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과 연관된 이야기들은 윤회설의 관점에서 설명할 때 매우 자연스럽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다가 다시 온다는 것인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데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가 다시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궁극적으로는 성서에 나타나는 윤회설의 흔적들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리스도교 교리는 왜 윤회설과 연관된 이런 흔적들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가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부활사건을 이야기하는 신약성서를 비롯하여 구약성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왕상17:21~22; 왕하4:34~35; 마9:24~25; 막5:39~42; 눅7:14~15; 눅8:52~55; 행9:40, 20:9~12). 이 내용들은 공통적으로 죽은 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시간의 간격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영혼은 그 동안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인가?”

이 질문 안에는 두 가지 사고 -①영혼불멸설과 ②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게 된다는 장소- 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다시 육체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그 영혼은 어디에 있다가 오는 것이냐는 장소문제가 연관되므로 윤회설적인 관념에서 볼 때 불멸하는 영혼의 여행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히11:14~15 참조).

나사로의 일어남 The Raising of Lazarus,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c. 1609,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세 장소?

통상적으로 사악한 자의 영혼은 죽어서 땅 속에 있는 지옥으로 가고, 선한 자의 영혼은 죽어서 천상의 나라가 있는 하늘로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는 구조적으로 땅 속의 지옥, 천상의 하늘나라로 불리는 이원론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 사이에 어정쩡한 중간지대가 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이미 육체를 벗어났기 때문에 지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일한 개념의 지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인 존재는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저 세상인 천국이나 지옥”이 아닙니다.

이런 틈새 관념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지대 개념을 갖게 하는데 여기서 무속적 귀신론이 파생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에 사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으로 직행한다고 생각됩니다. 통념에 의하면 그런 사악한 영혼들이 지상에 잠깐 동안이라도 머물면 지상의 질서는 엉망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그렇지만 죽자마자 즉시 땅 속의 지옥으로 떨어지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 영혼들은 어정쩡한 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상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은 그 영혼들이 지옥으로 바로 직행할 만큼 그렇게 사악한 영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렇다면 그 영혼들은 “덜 악한” 영혼들인 셈입니다.

귀신은 중간지대에 있는 죽은 자의 영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악한 영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자마자 즉시 지옥으로 바로 떨어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악한 짓을 합니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병을 주거나 불행을 가져다주는 귀신입니다. 그러다가 능력 있는 축귀자를 만나면 쫓겨나 방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귀신개념은 이렇게 어정쩡한 중간지대에 머물면서 인간을 괴롭히는 죽은 자의 사악한 영혼들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죽으면 즉시 천상의 나라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아직 천상으로 올라가지 못한 ‘자격 미달’의 선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 영혼들 역시 어정쩡한 중간지대에 머물면서 지상을 왕래하는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합니다. 역시 그 영혼들도 귀신입니다. 그러나 착한 귀신입니다.

그 영혼들은 죽자마자 천상의 나라에 오르지 못했지만 착한 영혼들이기 때문에 인간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기도 하고 감당하지 못할 일을 이루도록 도움을 주는 등의 선한 일을 합니다. 그런 후 천상의 나라에 오르지 못했던 어떤 부족분이 채워지면 그 착한 귀신들은 마침내 천상의 나라로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귀신들의 거처에 대해서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지대 개념의 공중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귀신 관련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귀신이란 존재는 “아직 이승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중간지대 개념의 공중에 머물러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엡2:2참조).

귀신들의 계급?

산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자의 사악한 영혼과 관련된 귀신론에 따르면 귀신을 포함한 악령의 세계에 계급이 있는 것으로 논해지기도 합니다. 두목격인 사탄, 혹은 마귀의 존재를 통해 사악한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구성하여 계급화 시킵니다. 그에 따라 어떤 이들은 성서에 나타나는 귀신 관련 내용들을 통해 악령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세 단계, 혹은 두 단계의 계급으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사탄(하나님 급)➡마귀(천사 급)➡여러 귀신들(부하들 급)

이와 같은 삼계급식 이해는 히브리어의 사탄을 우리말의 마귀로 번역한 것임을 간과한 데서 비롯됩니다(마4:1,5,8,11→10: 계20:2etc.).

혹은 사탄(=마귀)➡귀신들(부하계급)

이런 이해는 사탄이 단수로 사용되었으므로 사탄을 두목격인 하나의 개체존재라고 보는 관점에서 연유합니다.

윤회설과 성서에서 말하는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환생하여 다시 자기가 가졌던 몸으로 귀환함으로 자신의 수명을 마저 다 살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아직 젊거나 어린나이에 갑자기 죽은 경우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렇지만 살만큼 살고 죽었다고 생각되는 노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내용이나 억울하게 죽은 한맺힌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는 식의 이야기는 성서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뜻하지 않게 너무 일찍 죽은 아이를 살리는 이야기입니다(왕상17:17이하 참조). 열왕기하에 나타나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도 이와 같습니다(왕하4:17이하 참조). 신약에서 보게 되는 다시 살아난 사건의 주인공들도 젊거나 어린 영혼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젊은 여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다비다와 젊은 청년인 유두고 사건이 대표적입니다(행9:36절 이하; 행20:9 이하).

그런데 어떤 종교의 윤회설 관련 이야기를 보면 좀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존재의 형태가 아닌 동물이나 식물, 혹은 다른 형태의 존재로 다시 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인간존재로 오긴 하지만 세상으로 윤회할 때마다 고통스런 삶을 반복함으로서 오히려 죽지 못하는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 속에서 죄악된 인간의 존재성이 거룩해지거나, 다시는 고통스런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해지면 윤회를 멈추고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대체로 참 안식과 참 평안이라는 요소와 연결됩니다. 그것은 윤회설이 대부분 종교적 교훈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귀신과 교제하는 사람?

죽은 사람의 영혼과 살아 있는 사람이 서로 접하는 이야기들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무속신앙이 갖는 큰 틀은 무당과 굿의 형태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무당은 사람을 돕는 착한 귀신, 혹은 착한 영을 세상으로 불러 모셔 오는 일을 합니다. 이때 무당의 역할은 고난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인간과 (귀)신 사이에서 중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 짓는 사후의 세계관과 더불어 영혼불멸설, 그리고 윤회설과 연관되어 사유되는 환생, 혹은 귀환개념이 ‘이전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혼선재설과 함께 이승과 저승, 이생과 전생을 통합적으로 이음으로서 삶과 죽음을 하나의 통으로 구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영혼들은 대부분 죽은 후에 거의 즉시 천상의 나라로 들어간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후에 천상의 나라로 즉시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모자라는 선행’을 보충해야 하는 착한 귀신들에 대한 선행 관련 이야기는 별로 없는 편입니다.

오히려 착한 귀신들, 혹은 지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선한 영들은 천상의 지상에서 사람들이 빌면 그에 응답하여 죽음의 세계에서 이생으로 돌아와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거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서 보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저승에서 이승으로의 왕래 관념을 표지하며(눅16:27~28 참조) 사람이 다급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나고 싶어 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그림이 구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에게 가서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청했던 이야기는 그에 대한 전형적인 표상입니다(삼상28장).

귀신들림의 이유는?

다시 살아났다고 할 때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원래의 육체로 되돌아왔다는 그림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졌던 이전의 육체로 되돌아왔음을 그리게 합니다. 떠났다가 되돌아왔다는 그림을 통해 환생, 귀환의 윤회설적인 요소를 짚을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이전 육체로 다시 되돌아왔다는 것과 함께 그들의 육체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점이 전제됩니다.

자신의 육체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거나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어디에 매장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육체로 환생하는 귀환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영혼은 다른 사람의 육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무속적 이야기들에 따르면 이런 일은 대부분 귀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귀신에게 포착되어 귀신이 들게 된 사람은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이런저런 큰 부작용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이상해진다든가 육체에 병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빙의(憑依, possession by a spirit)’라고 표현되는 ‘귀신들림’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윤회설에 대해 함구하는 이유를 향하여

하지만 요한복음에 있는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난 사건’은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나사로의 시신은 도무지 상태가 좋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11: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가졌던 바로 그 육체로 되돌아왔습니다. 이것을 두고 나사로의 육체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체로 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일반적인 환생, 귀환의 개념이 지향하는 궤도를 벗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도무지 영혼이 귀환할 수 없는 상태로 육체가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영혼은 죽기 전에 가졌던 자신의 육체로 되돌아왔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의 몸은 부활체이고 나사로의 몸은 부활체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사로의 육체는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났었는데 예수의 육체에 대해서는 그런 묘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혼이 예수의 몸에 다시 오는 것이 나사로의 경우보다 더 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기 어렵게도 예수의 부활도 육체를 떠나셨다가 자신의 육체로 다시 돌아온 것이므로 환생을 이야기하며,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귀환을 말합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것이므로 윤회설의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집니다. 특히 초림 때와는 다르게 성인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장소”문제가 부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사로의 경우 그의 영혼은 그 며칠 동안 대체 어디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일까요? 천국에 갔다가 왔을까요? 아니면.... 중간지대 개념의 공중에 머물다 자신의 육체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또 요한복음에 의하면 육체를 떠나셨던 예수의 영혼은 천국에 다녀오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한 것으로 그려집니다(요20:17). 그래서 나사로의 경우에서처럼, 혹은 나사로의 경우보다 더 강하게 예수의 영혼은 부활 전까지 어디에 계셨냐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부활 직전까지 지옥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벧전3:18~19; 4:6 참조).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전서를 갖고 요한복음을 해석하려는 조립식 조합일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전서의 본문맥락상 그렇게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의 해당 구절이 요한복음 20:17에 대한 주석이나 해석도 아닐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전서의 해당구절은 심판을 말씀하는 흐름 속에 위치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의 구절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혼은 그 동안 어디에 계셨느냐를 밝히는 구절로 애용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성서에 나타나는 모든 경우들은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이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복음서를 비롯한 성서 안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전체와 연결되면 나사로의 경우를 비롯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 그들의 경우 그 영혼들은 육체에 되돌아오기 전에 그 동안 어디에 가 있다가 온 것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들의 영혼은 대체 그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윤회설의 흔적이 다발적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입장이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과연 그리스도교는 성서본문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윤회설적인 개념들을 완벽하게 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무슨 이유로 윤회설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한발자국씩 전진하는 마음으로 계속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연말연시 되시기 바랍니다.

본지제휴 <당당뉴스>, 무단 전제 및 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