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설교하면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가난'을 설교하면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 최태선
  • 승인 2017.01.30 0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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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이웃 천주교인의 소개로 한 교회의 청빙 위원인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청빙의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급여와 집과 자동차와 그밖에 돈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조건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최고 상류층은 아니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조금은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교인은 그리 많지 않지만 교회의 재정은 탄탄하다면서 그분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와서 설교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결정적인 약점들을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그분에게 교회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진리의 길을 걸을 용의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가난이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강단에서 가난해져야 한다고 설교한다면 교인들이 그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이 말이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가난과 복음은 마치 상극처럼 그렇게 언제나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난한 교회

그리고 최근 들어 이곳저곳에서 교회가 가난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하는 걸 바라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여 참신한 바람을 일으키며 급진적인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지만 최근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불거진 문제에서 교인들이 부의 문제점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 한 원인일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반갑거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화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들었지만 신앙의 예수로 만들어 경원시하며 본받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교회를 내걸었지만 가난을 교회와 목사에게만 적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교회가 가난해야 하기 때문에 헌금을 안 할 것이고 목사에게는 가난의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각종 사례를 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의지가 전혀 없이 가난한 교회를 지향함으로써 교회는 다시 하나님 백성의 모임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도가 될 것이며, 일상과 동떨어진 종교적인 위선으로 교회와 복음이 왜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은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것(마11:5, 눅7:22 참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들 앞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해 죽기보다 싫은 것이 가난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난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복음은 그들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이, 하기 싫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게다가 성서가 말하는 가난이란 단순히 돈이 없거나 물질이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가난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재물의 많고 적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이면서도 가난할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전혀 가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유가 많아 부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재물에 종속되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매우 드물겠지만), 지금 당장은 가진 것이 없어 가난하지만 재물이 주어지면 언제라도 어떤 부자보다도 사치하고 남에게 인색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소유가 없더라도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소유만이 가난의 척도가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서 가난하게 살기도 어렵지만, 없는 가운데 가난하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난의 척도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비울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가식 없이 자신을 완전히 비운 자만이 진정으로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식 없이 자신을 비우는 것은 가진 것을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전한 삶과 구원을 위해 당신에게 다가와 질문했던 부자 청년을 보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부자 청년은 자신의 재산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부자인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없었기에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청년을 향해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4)

그러나 누구나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사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남을 위해 상대방의 처지가 되려는 사람, 남을 위해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장 가난하신 분이셨고, 영원히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입니다. 

가난이 중요한 이유

먼저 가난이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이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는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가장 낮은 자리, 비참함과 경멸과 무시와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서만이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자리였고, 그 처절한 버림의 자리에서 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 사람들이 아무리 사랑을 말한들 그것은 하나의 상투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 이름을 사랑이라 지어도, 아무리 자신들의 목적이 사랑이라고 주장하여도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서가 말하는 자비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더욱 더 두드러지는 것은 가진 것이 없으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내어주는 법을 배우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일부를 희생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통째로 내어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우고 이 땅에 오셔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준 것은 물론 그리스도이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준 것은 곧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가난한 교회는 결코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되어야 합니다.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사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남을 위해 상대방의 처지가 되려는 사람, 남을 위해 기꺼이 이끌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는 곳이 바로 가난한 교회입니다.

오래 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내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시대 헬조선 한복판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의 가난한 교회를!(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용기 있는 분들과 함께 꼭 가난한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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