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학살을 옹호하는 분인가?
하나님은 학살을 옹호하는 분인가?
  • 이중수 목사
  • 승인 2017.04.04 14:5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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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 여호수아 6:20~21
이 글은 여리고 성 멸망에 대한 일반의 의문과 질문들에 대한 해명으로 시도한 것으로, 4월 2일 플로리다 올랜도새길교회 설교문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글쓴이 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0-21)

여리고 성의 붕괴와 멸망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성취한 승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끝까지 입을 다물고 여리고 성을 7일간 돌았습니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진 후에 침입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고 가축까지 전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승리의 분위기는 회의와 혐오의 분위기로 바뀔 수 있습니다. 왜 자범죄가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인단 말입니까? 가축들까지 죽여야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가축들도 죄를 지었습니까? 이런 의문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잇달아 생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먼저 가서 쳐야 하는가?」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침공하여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은금과 동철을 강탈할 권리가 있는가?」

「이런 지시를 하는 하나님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부도덕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도 아모리 족속의 두 왕들과 그들의 백성을 전멸시키고 땅을 빼앗았습니다(1:10). 그런 무자비한 침입자들 앞에서 여리고 성민을 비롯하여 가나안 백성이 모두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1:11; 5:1)고 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1:9; 9:24).

얼마나 큰 공포에 떨었으면 이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물론 악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고 말하면 간단할지 모릅니다. 혹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면 교리적인 정답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갓난아기들까지도 몰살시키는 잔인성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조화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은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 사이에서 선택한다면 누구를 택할 것 같습니까? 교인 중에서도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불신자들이겠습니까!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주된 이유의 하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이처럼 많은 고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고난을 일으키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신은 더욱더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지적하는 실례의 하나가 그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여리고 성민의 ‘학살’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세상에 널리고 깔린 숱한 고난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악을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신은 믿을 가치가 없으며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고난’의 문제는 인류의가장 큰 숙제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 고난이 인간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난 문제에 부딪히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나 자식을 잃는 사람, 예고 없이 찾아든 불치병, 지체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 고문과 성폭력을 당한 사람, 인신매매나 납치로 황폐해진사람, 대규모 전쟁 살상, 난민의 비참한 생활, 강제 수용소 감금, 테러 집단의 무차별 살육, 기아, 가뭄, 홍수, 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로 말미암는 인간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루도, 아니 단 일 분도 고난이 없이 넘어가는 때가 없습니다. 날마다 기가 막힐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을 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이지 날마다 숱한 사람들이 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다 안다면,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 자신이 직접 어둠의 골짜기에 빠져 보면, 시편 저자처럼 “주여 언제까지니이까?”라고 탄원하거나, 요나 선지자처럼 “죽는 것이 내게 더 나으니이다”(욘 4:8)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한때는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민 11:15; 왕상 19:4).

솔직히 말해서 크리스천들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과 고난들 앞에서 할 말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악과 고난 문제를 시원하게 다 해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의 악과 고난 문제를 간단하게 다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존재와 고난의 현실은 많은 부분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롸이트(Christopher Wright)는 고난 문제를 다룬 그의 저서 제목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the God I don’t understand)이라고 붙였습니다. 저명한 신학자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이해할 수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보고 듣고 당하는 고난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성경에 물론 궁극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고난을 푸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악과 고난의 문제를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도 물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자체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분량에 따라 십자가의 조명 속에서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새롭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께서 다시 이 고난의 세상으로 재림하실 때에는 성도들의 모든 눈물이 닦여지고 다시는 죽거나 애통해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게 될 것입니다(계 21:4). 그때 우리는 전능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졌던 악과 고난의 숙제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전쟁사를 보고 식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이유의 하나는 가나안 정복과 관련된 전쟁의 잔인함입니다.

- 불신자들의 관점에서는, 가나안 정복은 종교적인 학살 내지는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입니다.     

-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가나안 정복을 대체로 영적 전쟁에 대한 그림으로 해석합니다. 칼을 뽑고, 성채를 무너뜨리며, 아이들까지 죽이고, 가나안 땅을 통째로 빼앗는 것 등을 악에 대한 영적 싸움의 예시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이 원리적으로 영적 싸움에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 역사적 사실에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잔인성을 경감시키거나 성형시키려는 의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더 나은 접근은 없을까요? 

첫째, 일부 신자들을 포함해서 불신자들의 부정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맥을 제시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은 땅이 없는 한 민족이 영토 확보를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입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전쟁 방침이 가나안 정복 스타일을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과 타국의 주권을 무시한 인종 청소와 양민 학살이 아니었음을 해명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은 ‘성전’(聖戰, Holy war)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

우리가 구약에 나오는 전쟁 스토리에서 식상하는 주된 이유는 구약 당시의 근동 문화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인의 입장에서 읽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제네바 협약도 있고 유엔 산하의 국제 전범 재판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구들이 어느 정도로 악의 재현을 방지하고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나마 고대 사회에서는 전범(戰犯)이라는 개념도 희박하였습니다.

자기 나라 백성을 학대한 지도자라고 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잡아서 재판하는 일도 없었고, 전쟁 때에 사람들을 너무 많이 학살했다고 해서 감옥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에 특별한 루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선진국에서처럼 인권 운동이나 인종차별 반대나 유약자 보호가 법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정복 스토리를 당시의 전쟁 문화와 서술 방법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의 하나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오해하고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전쟁은 일어납니다. 사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전쟁을 하고 수백만의 인명 피해를 일으킵니다. 국제법이 있어도 여전히 잔인하며 민간인들이 학살됩니다. 그런데도 흔히 종교적인 이유에서 전쟁을 ‘성전’(聖戰, Holy war)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거나 테러단을 정치적 이유에서 자유의 투사(Freedom fighter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크리스토퍼 롸이트는 ‘성전’(Holy war)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전쟁처럼 들리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도 이를 정당시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슬렘 테러단들은 자폭자들에게 ‘지하드’(jihad)로 일컫는 성전으로 죽으면 순교자가 되기 때문에 알라신이 있는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도 과거에 ‘성전’(聖戰)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무자비한 살육과 박해를 저질렀습니다.        

- 십자군 전쟁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중동 지역에서 모슬렘 교도를 무수히 학살하였습니다.

- 종교 개혁 때에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으로 서로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 스페인 종교재판 때에 유대인을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거나 종교개혁에 가담한 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였습니다.

현대판 종교 테러도 성전(Holy war)이나 지하드(Jihad)라는 이름을 걸고 나옵니다. 그러나 말이 ‘거룩한 전쟁’(聖戰)이지 잔혹하고 불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좋다고 해서 전쟁 행위가 미화되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성전’(Holy war)이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는 되도록  ‘성전’이라는 용어보다는 성경 자체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전’이라는 단어는 바른 문맥 안에서 사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릇된 뉘앙스를 풍기는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성전’(聖戰, Holy war)이라는 말 대신에 ‘여호와의 전쟁’(a war of Yahweh)이라고 불렀습니다(민 21:14).

그럼 ‘여호와의 전쟁’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인간들의 결정과 전략으로 일으키는 전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리고 성의 공격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국가적 원수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들을 싸워 이기는 전쟁입니다(삼상 17:47; 대하20:15).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가 총사령관이며 전쟁을 명령하고 승인합니다(수 1:6; 5:13-15). ‘여호와의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그의 백성이 동원되며 승전이 이미 보장된 전쟁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서도 적군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으로 멸망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애굽 군인들은 홍해 바다에서 수장되었습니다(출 14:13-14). 그래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고 하였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진군한 아람 군대에 환청(幻聽) 현상을 일으켜 오지도 않은 외국 원병들이 몰려오는 줄 알고 모두 도망치게 하였습니다(왕하 7:6-7). 만군(萬軍)의 여호와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 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으키는 소위 ‘성전’에서는 승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전쟁을 일으키면서 마치 하나님을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나안 정복이 일반적으로 오용되는 의미의 ‘성전’(Holy war)이 아님을 숙지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은 ‘‘헤렘’’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수 6:17) 

여기서 ‘온전히 바치는 것’은 히브리어로 ‘‘헤렘’’(Kherem)인데 완전히 파괴하여 드리기로 정해진 것을 가리킵니다(devotion to destruction; devoted things). ‘헤렘’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모압과 같은 주변 국가에서도 특별한 때에 행해졌다는 비문 상의 기록이 있습니다. 만일 ‘헤렘’이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전쟁 방식이 아니었다면, 다른 나라 신들도 마찬가지로 잔인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헤렘’은 액면대로 보면 누구에게나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의문을 일으킵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도록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도륙시키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도대체 가나안 땅을 점거할 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저항한 자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야만적인 수준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을 배척해야 하지 않는가? 」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는 ‘헤렘’에 대한 전쟁 기사를 읽을 때 구약 성경 자체의 ‘헤렘’ 규정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의 온 땅을 소유하신 주인이십니다(창 1:1; 출 19:5; 시 24:1). 그래서 땅을 분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전유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 4:17).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공정하고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소돔과 고모라는 너무도 부패하여 의인이 열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겁다”(창 18:2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공의를 집행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의 경우에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 사백 년을 기다리셨습니다(창 15:16).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며 심판관이시지만 즉흥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헤렘’을 선포하시지 않습니다. ‘헤렘’이 선포된 경우에도 그 적용은 상황에 따라 유동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서 자체 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헤렘’이 선포된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원칙적으로 전리품의 소득이 없어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 자신이 주관하고 통제하는 전쟁이기에 전리품도 모두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은 죽여서 바치고 물질은 ‘여호와의 곳간’(수 6:19)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헤렘’은 극히 예외적이었으며 훨씬 더 완화된 형태의 적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가나안 땅의 나라들에 대한 일반 원칙은 전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신 20:16-17). 반면에 약속의 땅이 아닌 먼 나라와는 화친을 허락하였습니다. 먼저 평화를 제의하고 듣지 않을 경우에만 공격하여 남자들만 죽이게 하였습니다. 이 경우에는 유아와 여자들과 가축들은 살려 주었습니다(신 20:10-15). 한편, 요단 동편에 있던 헤스본 왕 시혼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 먼저 평화를 제의했음에도 완강하게 반대하고 대적했기 때문에 모두 진멸하고 가축과 물품을 탈취하였습니다(신 2:26-35; 수 11:20). 그러나 가나안 땅 내에서도 여리고 성과는 달리 사람은 멸절시켰어도 물건은 소유하도록 허락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수 8:26-27; 11:14).

우리는 여리고 성의 공략이 가나안 정복의 전형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모든 성읍을 그런 식으로 박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약 여리고 성의 공격 방식을 ‘여호와의 전쟁’을 대표하는 모델로 삼는다면 역사적인 사실을 바르게 본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의 승전 기사는 당시의 서술 방식을 고려해서 읽어야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승전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의 전공(戰功) 기념비에는 그들의 왕이 적들의 씨를 말렸다거나 엄청난 수효의 적군들을 몰살시켰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철두철미한 멸살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여러 진술은 액면대로 보면 끔찍합니다. “모든” 땅을 “단번에” 빼앗고(수 11:42), “그 모든 왕들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다”(수 10:39-40; 11:14)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사적인 과장법을 사용하여 승전 기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사기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은 단번에 종료된 것이 아니고 상당한 시간을 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공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그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면 어떻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곳저곳에서 함께 살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가나안의 요충지에 있던 소왕국의 요새들은 전략적인 목적으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왕들도 처단했지만, 가나안의 전 지역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당시의 문학적 장치인 과장법을 이용하여 가나안 정복 기사에 적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서의 진술을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 진술 방법에는 고대 근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전쟁 스토리의 형식을 따랐다는 점을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헤렘’의 끔찍한 살육이 주는 혐오감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과장된 것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참혹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수 10:40)했다는 표현을 문자적인 전적 파괴로 보거나 인종 말살을 위한 대량 집단 학살(genocide)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집단 학살은 인종 우월주의를 내걸고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라고도 부릅니다. 이러한 인종적 우월주의는 어떤 이유로도 성경에서 철저하게 배격되었습니다(신 7:7; 9:4-8).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라고 해서 우월하게 취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다른 민족들과 동일하게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에 시내 산에서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고(신 9:8)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약속의 땅에서 타국으로 내쫓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공을 ‘인종 청소’나 ‘인종 말살’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니크하고 한정된 기간의 이벤트

가나안 정복에서 사용된 ‘헤렘’의 전쟁 방식은 이스라엘의 전쟁사에서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마치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인 듯이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헤렘’ 방식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후세대에서 반복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은 한 세대 안에서 발생했던 단일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약속의 성취가 전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여호수아 때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 때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나안의 요새를 파괴하고 땅을 점령한 것은 한 세대 안에 종료되었습니다. 비록 사사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은 강성해진 가나안의 블레셋 족속들과도 자주 싸웠지만,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가나안 정복 시대 이후부터는 ‘헤렘’ 방식의 전쟁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그 역할을 마친 전쟁 이벤트를 진술한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기사는 나머지 구약 시대의 전쟁 스토리에 대한 서론이나 전주곡이 아닙니다.

그럼 사울 왕 때에 아말렉을 진멸한 것은 ‘헤렘’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헤렘’ 방식으로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내린 것은 사실입니다(삼상 15:3). 그러나 사울 왕은 불순종하여 아말렉을 치면서도 아각 왕은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고 좋은 가축들은 선별하여 전리품으로 삼았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아각 왕을 처형하였고 사울은 ‘헤렘’의 원칙을 어긴 불순종으로 왕위를 잃었습니다(삼상 15:23). 아말렉 족속에게 ‘헤렘’이 적용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출애굽 때에 피곤해서 뒤에 쳐진 이스라엘 백성을 아말렉 족속이 후방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신 25:17-19).

그러니까 아말렉에 대한 집행이 지연된 것이지 사울 왕 때까지 ‘헤렘’의 전쟁 방식이 계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헤렘’이 적용된다고 해서 다른 족속들까지 무차별 살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을 공략하기 전에 겐 사람들을 경고하여 피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미디안 족속의 일부였는데 아말렉 족속의 영역에서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렘’의 전쟁에서도 무작위적이거나 이유 없는 살육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하나님 앞에서 죽일 때도 그의 사악한 죄를 언급하였습니다(삼상 15:33).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시기에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던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다시 사용할 필요가 없는 한시적 조치였습니다. 이것은 후세대가 따라야 하는 전쟁 모델이 아니었음은 이스라엘의 후속 역사가 증명합니다.

‘헤렘’의 전쟁 방법은 폐지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오신 새 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신정 국가 체제의 모세법을 더는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중수 목사 / 올랜도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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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2 2023-05-30 02:56:19
창세기 9장 20~29절을 다시 읽고 잘나신 야훼가 셈과 가나안을 동일하게 대했다는 헛소리를 할 것

lee 2022-01-23 15:22:07
젖먹이 유아와 노약자를 학살하고 처녀들을 전리품으로 취하는건 어떤 말로도 정당화 할 수 없음.

하하 2021-11-28 14:48:47
할많하않..

poweroftruth 2021-08-29 13:20:15
네 다음 전범

신천지 2019-01-03 12:42:53
과장된 전쟁이야기라면,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다는 성경을 부정하는 것인가요? 믿는자들은 전쟁의 잔혹함 앞에서도 참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 그게 성경적인 답인가요? 참 편리한 답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