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사라, 온 민족을 섬기는 자로 다시 태어나다.
아브라함과 사라, 온 민족을 섬기는 자로 다시 태어나다.
  • 김동문
  • 승인 2017.04.25 14: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개명에 담긴 의미 짚어보기
총으로 무장한 아랍유목민 남성들.(1873년 장소 미상) 아마도 아브라함 시대 유목민들은 칼로 무장했을 것이다.

할례를 받고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가 되었다.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이고, 왜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일까?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나일 문명에 접촉하며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유럽 문명과 미국 문명 사이에 끼여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그 타인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기호'로서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기 보다 타인에게 다가서는 어떤 의미가 될 때가 적지 않다. 고대 근동도 마찬가지였다.

할례를 마친 후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지시(?) 사항이었다. 그런데 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의 이름을 바꾸도록 한 것일까? 할례 받음과 개명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일까? 이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궁금함을 던져본다.

1.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 능력자? 청지기?

‘아비’ 또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마주하면서 무엇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우리는 시간 여행을 멀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가 우리에게도 100년도 안되던 시절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그 영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20세 이상의 건강한 성인 남자만이 사람이었던 시절이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물건 같은 존재였다. 사고파는 대상, 별다른 이유기 없어도 그냥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애꿎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미물 같았다. 그 시절 가장 힘있는 존재는 아비, 아버지였다. 그야말로 아비들의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 의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작지 않았다.

할례가 주어진 장소는 이스라엘의 남부 네게브 주변 지역이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이집트의 정치적 힘도 받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왔을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 이름을 대하면서 누구를 연상했을까?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버지? 고대 이집트 문명 한 복판에 살던 요셉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8)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창세기 41:40-41)

요셉이 표현한 내용 중에 '바로의 아버지'가 나온다. 여기서 '아비(아버지)'의 뜻은 어떤 뜻일까? 바로보다 높은 존재를 뜻하는 것인가? 바로가 명목만 있고, 실권을 요셉이 쥐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다.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통치자'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아비라는 단어는 (바로의) 충실한 관리자, 신하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온 집의 주’에서 나오는 ‘주’라는 단어조차 파라오의 청지기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브라함,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읽는다면 어떤 느낌, 어떤 의미였을까?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는 아니다. 여러 민족을 섬기는 자, 여러 민족의 청지기 같은 존재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2. 사라, 열국의 어미? 권세자? 여주인?

사라의 이름 뜻에 대한 풀이는 다양하다. 많은 이들은 사래가 ‘공주’라는 뜻이었고, 사라는 ‘왕비’라는 뜻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사라’라는 이름 뜻에도 공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여주인(Lady) 또는 공주(Princess) 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주석들이나 학자들은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여주인 또는 공주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우리의 고정관념이 작동할 것 같다. 전근대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도 이 단어가 ‘갑 질’의 상징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대 근동에서 이 단어를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었을까?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세기 17:15, 16)

‘열국의 어미’,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수식어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 문명권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왔을 사라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 이름을 대하면서 어떤 존재, 누구를 연상했을까?

당시 이집트 신화에서 여주인 또는 공주로 불리던 여신이 있었다. 하토르(Hathor)이다. 그를 수식하던 표현에는 하늘과 땅의 여주인, 돌무화과나무의 여주인, 파라오의 여주인 등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는 하늘의 여신이었고, 하늘 여왕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감은 하늘의 유모였다. 파라오를 양육하는 자였다. 모든 어미들의 어미였다. 여성들의 여신으로서 임신과 출산, 어린이의 여신이었다. 여성들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였다. 하토르 여신의 이미지는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섬기는 신이며, 건강한 어미의 속성을 보여주는 여신으로 볼 수 있다.

사라의 이름 뜻,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읽는다면 어떤 느낌, 어떤 의미였을까? 이 또한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는 아니다. 여러 민족을 낳고 기르고 가꾸고 지키는 자, 여러 민족의 유모 같은 존재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생명의 나무로 알려진 돌무화과나무 사이에서, 하토르 여신이 생명의 물과 삶의 힘을 전해주고 있다.

3. 아브라함과 사라는 새로 태어났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그 이름 값하는 삶은 견고한 부족장, 가부장제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에 주어진 것이다. 권위주의가 가득 차 있던 그 시대에서 던져진 잔잔하지만 강력한 목소리였다. 섬기는 자로서의 아버지(아비)의 존재감을, 낳고 기르고 돌보고 채워주는 자로서의 어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출발이다. ‘능력자'의 새로운 이미지, 섬기는 자, 돕는 자, 필요를 채우는 자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일까? 다른 이들의 위에 있는 자, 군림하는 자의 모습과 사람들의 곁에 있는 자, 섬기는 자, 높여주는 자의 모습, 어떤 모습이 다가오는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정체성 안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담긴다. 군림하고 지배하고 장악하고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능력 있는 남자 가장이 아니라, 섬기는 가장, 섬기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당시의 견고했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부장의 모습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의 왕비, 안주인, 여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잉태하고 낳고 젖을 주고 키우고 돌보고 베풀고 사랑하는 안주인, 어미의 삶으로 사라를 초대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할례가 죽음과 부활, 창조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의 할례는 옛사람(기존의 가치관에 젖어 사는 삶)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이벤트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세계관에도 깃들어 있던 죽음과 깊은 어둠, 혼란을 뚫고 밝음과 삶,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거대한 의식이었다. 할례의 흔적을 몸에 지님은 창조질서를 수행하는 자라는 지워지지 않는 존재로 살라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예수의 고난, 찢김과 피 흘림, 죽음과 장사되어 무덤에 눕혀있음, 다시 살아남, 하나님나라의 회복의 파노라마를 떠올려본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할례 시술을 하고는 누워서 몸의 회복을 기다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 새 창조의 시간을 바라본다. 그 피 흘림의 의미를 다시 기억해본다.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 권세부리는 자, 행세하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 돌보고 가꾸는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다시 바라본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표식인 할례 받은 자로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땅이 그리고 이웃이 복을 누리는 통로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도영 2022-08-24 20:5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