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메시아의 모험
어느 메시아의 모험
  • 최태선
  • 승인 2017.05.16 23: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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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같은 하숙방을 쓰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 배울 것이 많았던 존경스러운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힘이 조금 더 세다는 이유로 늘 그 친구를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선각자이며 천재였습니다. 속 좁은 제가 미처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옵니다.

한 번은 그 친구와 산책을 나갔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는데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당시에는 가끔씩 열리던 교회 행사였습니다. 성공회 교회였는데 일일찻집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호기 있게 들어가 차를 주문하였습니다. 예쁜 여학생 하나가 주문을 받고 차를 가져다주었는데, 신청할 음악이 있으면 신청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지만 막상 신청하려니 작곡자와 곡명이 함께 떠오르는 클래식 음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친구가 주저 없이 음악을 신청하였습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푸치니의 마담 버터플라이 가운데 허밍 코라스, 베르디의 나부코 가운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등등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날로 포터블 라디오(당시로는 큰 결단)를 사서 열심히 들으며 클래식 음악의 내용을 적어가며 작품번호까지 다 외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듣기만 해도 그 곡을 어떤 지휘자가 지휘하고 있는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한 둘이 아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친구가 읽던 책을 통해서입니다. 어느 날 보니 그 친구의 책상에 두껍지 않은 검은 색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었습니다. 짧은 내용이라 단숨에 읽었고 그 내용은 강렬하게 제 뇌리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오래도록 제 삶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갈매기의 꿈

조나단 리빙스턴이라는 갈매기가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갈매기들이 하루에 모여 파도에 떠밀려온 물고기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을 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높이 그리고 바르게 날고자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 훈련 덕으로 조나단은 깃털이 다 빠지고 앙상하게 말랐습니다. 그런 조나단의 모습을 동료 갈매기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갈매기의 전통과 법규에 따라 살지 않는 조나단을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나단을 자기들의 세계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렇게 홀로 된 조나단은 그때 다른 갈매기들을 만났습니다. 이미 자유의 경지에 다다른 보이지 않던 갈매기들입니다. 그 갈매기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나단 역시 시공을 넘어 비행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조나단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저는 빠르게 날고자 훈련을 거듭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모습에서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선 저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앙상하게 마른 조나단의 모습은 수도자의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이후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제 신앙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제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조나단이 동료 갈매기들을 그 놀랍고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그를 자신들의 세계를 분열시키는 위험인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조나단의 행보에서의 그의 단호한 결단과 용기는 저의 신앙의 길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보듯이 자유의 경지에 이른 갈매기들이 있었지만 거기에 이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의 수가 실재보다 훨씬 더 적어보이는 이유는 자유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저는 아직 자유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많이 벌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진리, 특히 복음이 말하는 진리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자유

진리의 길에서 권위란 언행이 일치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이 자유롭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행위에 거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나 그 행동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지식인이나 그렇지 않은 자를 대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었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만나고 교제하였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 세리와 같은 당시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주저치 않았고, 창기와 문둥병 환자들는 물론 이방인과 같이 당시 보통 사람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위는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이 자유로 예수님은 존귀한 존재임에도 귀함에 머물지 않으셨고, 현명하면서도 내세우지 않으셨고, 높으면서도 비천해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인 창녀, 세리, 죄인, 과부, 병자들과 같은 하찮은 인간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친구 삼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도 잘 못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선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식과 사회의 관습을 깨뜨리고, 모든 인위적인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사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그 어느 율법학자보다 더 율법에 충실했고, 그 어느 도덕주의자보다 더 도덕적이었으며, 그 어느 제사장보다 하나님과 가까웠으며,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자 고행하는 수도자보다 더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의 이 자유로운 행위 앞에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꼈으며, 스스로 권위 있다 생각하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자유이며 복음과 진리가 말하는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를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뿐만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자유를 본받고 따르려는지 이에 대한 여부를 따져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히 예수님을 따르느냐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히 우리가 그 자유를 소망하고 내 삶에서 자유의 삶을 실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환상

갈매기의 꿈이 자유를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제게 심어주었다면 어떻게 그 자유의 삶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준 또 다른 리처드 바크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어느 메시아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소설 <환상>입니다. 이 책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상: 어느 메시아의 모험(리차드 바크)

거대하고 맑은 강물 밑바닥에 군생이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 착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 위에 조용히 흘렀습니다. 생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강바닥의 바위와 나뭇가지에 꽉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달리는 것이 그들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매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한 생물이 다른 생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꼭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물론 강물은 그를 넘어뜨려 바위 위에 내던졌지요. 그 생물은 다시 매달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흐름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 올려 자유롭게 했습니다. 다시는 멍들거나 다치지도 않게 되었지요. 이방으로부터 온 하류의 군생들이 그를 보고 외쳤습니다. "기적을 보라! 우리와 똑같은 생물이지만 그는 날고 있다! 메시아를 보라!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하소서!" 강물 위를 떠내려가던 자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며 저마다 잡았던 손을 놓기만 하면 강물은 즐거이 우리를 들어올려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바위에 매달린 채 '구세주여!'라고 외치기만 했습니다. 그 생물은 흐름을 타고 사라졌고 남은 이들은 자기들끼리 구세주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자기 교회 안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납니다. 매달리기만 할 뿐 손을 놓을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빠져 복음이 요구하는 모험의 세계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이 틀렸음을 깨닫고 새로운 삶의 방식인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익숙한 삶의 방식을 버리기란 마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환상>에 나오는 생물들처럼 바위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만 합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서 있는 삶의 길에서 벗어나면 죽거나 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으로의 초대는 바로 그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방식에서 과감히 손을 놓아버릴 때 우리가 일지 못했던 더 큰 세계, 더 완벽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사랑이라는 모험에 뛰어든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경쟁에 익숙해지고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영원히 뒤지고 만다는 위기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바위에 매달린 채 '구세주여!'만을 외치는 <환상> 속의 생물들과 같이 만듭니다. 그리고 모험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갑니다. 

모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살고 있는  땅을 떠난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적대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디로 가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게 하시며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즉시 떠난 것은 모험을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모험하는 인간입니다. 신앙인은 믿기 위하여 기꺼이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있던 자리에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묶어놓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자기의 모든 것을 규정했던 주변 문화, 모든 소유와 집착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집과 부모와 형제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19:29)

신앙의 본질은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위하지 못하는 것은 떠나지 못하는 인간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묶인 인간들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라디오와 티브이에 묶이던 사람들이 이젠 스마트폰에 묶입니다. 주식에 묶이고, 소유에 묶이고, 인기와 성공에 묶이더니 이젠 sns가 일반화되어 누구랄 것 없이 나르시스가 되었습니다. 점점 더 단단하게 묶인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묶일수록 자유를 잃고 신앙 역시 불가능해집니다.

믿고자 한다면 떠나야 합니다. 모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알게 되면 새롭게 열린 넓은 세상에서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모험으로 뛰어드는 분들과 함께

저는 오래 전 제 친구를 통해서 리처드 바크와 그의 책들과 만나게 되어 진리의 길에 들어섰고, 사람들의 낯선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도 모르지만 새삼 그 친구가 그립고 그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제 제가 이 글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손을 놓고 강물에 휩쓸린 생물처럼 된 가나안 성도님들의 떠남이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유를 찾아 모험의 세계로 뛰어드는 모든 분들과 함께 손을 잡고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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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5-22 23:20:49
아멘입니다. 목사님의 글에서 늘 은혜를 받습니다.
한국 보수교회에서 이런 자유인들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어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