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남용과 교회의 변질
설교 남용과 교회의 변질
  • 신성남
  • 승인 2017.05.31 05: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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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메시지가 흥행하는 시대

나는 지난 글을 통해서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그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특별히 계시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설교집이나 성경주석이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설교자는 무오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오류의 가능성이 늘 상존한다. 이 세상에 무오한 사람은 없다. 설사 평생 신학에 매진한 전문 신학자라 하더라도 그가 무오한 존재는 아니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은 마치 중세 교황의 교령이나 강론을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자는 것만큼 몰상식한 말이다.     

설교가 필요한 이유

그럼에도 우리는 설교의 중요성을 오해해선 안 된다. 나는 결코 설교 무용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설교는 반드시 필요하고 유익하다. 여기서는 우선 두 가지 이유만 강조해서 논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문제'다. 성경은 선지자나 사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읽고서도 서로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른바 문자 해석상에 이견이 발생한다.

설교가 꼭 필요한 이유는 '문자(Text)'만 읽지 말고 '내용(Context)'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6:54)"라 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실제로 피를 마시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는 직유나 은유 등 다양한 표현법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특히 이런 문자적 해석을 가장 잘 악용하는 무리들이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다.

두 번째는 '시대적 적용의 문제'다.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성경조차 무려 2000년 전의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습도 현재와는 아주 크게 다르다. 그래서 단순히 성경을 열심히 읽고 달달 외운다고 해서 그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셨으니 "오늘날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유사한 경우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유대적 관습의 사회가 아니다. 여자 성도 또한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다. 성경에는 여자 사사와 여자 선지자도 있다. 그러니 여자가 목사를 못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구나 개신교 목사는 제사장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교사의 직분에 가깝다.

따라서 성경의 특정 구절 몇 개를 곡해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무지의 소치다. 유감스럽게도 소위 정통이란 교단 속에도 여성 목사를 결사 반대하는 무식한 지도자들이 아주 많은 게 작금의 한심한 현실이다.

설교는 내용(Context)을 전달하는 사역

아울러 성경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보다 신약의 성도들이 훨씬 더 명료하게 복음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보다도 더 복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현대 설교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교가 꼭 필요한 이유는 성경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다.

사실 문자만 전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부지런히 책만 나누어 주면 된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와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성경을 풀어서 열심히 가르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당시 유대의 바리새 제사장들은 같은 성경을 들고서도 진리를 크게 오해했다.

요즘 십일조를 강요하는 목회자들 또한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으니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적 오류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의무적 십일조는 구약 신정국가의 율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율법의 정신은 신약에서 자원적 연보로 완성되었다.

예수의 직전 제자이며 신약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들 중 단 한 명도 십일조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이 없다. 당연히 사도들의 초대교회에서 십일조나 안식일을 시행한 사례도 전혀 없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안식일은 안 지키면서 유독 십일조에 집착하는 그 깊은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그러므로 가장 좋은 설교는 성경이 조명하는 내용을 바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설교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성경의 진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 하는 설교는 그저 인간의 사설이나 잡설이다. 그것은 명백히 변조나 위조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강단에 서야 한다. 설교는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이나 언변이나 인품을 과시하는 게 아니다. 설교는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리하거나 대신하는 게 아니다. 설교자는 메시지를 창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전달하는 메신저(전달자)다.

인간의 메시지가 변질의 근원

그런데 어떤 설교자는 자신이 '전달자'가 아니라 마치 메시지의 '생산자'라도 되는 양 처신한다. 남들이 모르는 계시나 비밀을 깨달은 무슨 불세출의 선각자나 대스승이라도 되는 양 권위적 태도를 취한다. 거의 목불인견 수준이다. 이른바 설교 남용의 시작이다.

흔히 유명 목사라는 위인들 중에 이런 부류가 많다. 자기가 메시지를 잘 생산해서 대형 교회가 된 줄로 착각한다. 그러니 그런 교회에선 하나님의 메시지는 단지 장식일 뿐이고 오히려 인간의 메시지가 흥행한다. 예수의 정신을 잊은지는 아주 오래다. 십자가 사역 대신에 십일조 장사에 몰두한다. 교회의 단물을 빨며 몸집 부풀리기에만 분주하다. 그 동네에선 만사형통이 진리고 만수무강이 복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전달하는 전령이나 연락병의 역활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다. 설교는 나의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다. 메시지의 손상 없이 원형 그대로 전하는 게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내 사상, 내 취향, 내 목표, 내 욕심, 내 권위 따위는 본문 메시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도리어 설교가 오염되어 교회를 변질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만일 연락병이 중간에 제멋대로 명령서를 조작하면 평시에는 영창감이고 전시에는 총살감이다. 게다가 연락병이 무게 잡고 호통친다면 얼마나 우스운 작태인가. 강단에서 회중에게 훈계조로 말하거나, 반말하거나, 핀잔주거나, 겁박하거나, 성질내거나, 휘두르거나, 또는 우쭐하는 자는 설교자의 함량에 크게 미달하는 사람이다.

좋은 설교는 양들의 배를 부르게 하고 나쁜 설교는 목자의 배를 불린다. 좋은 설교는 교회를 세우고 나쁜 설교는 종교를 세운다. 좋은 설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나쁜 설교는 목사님 나라를 확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나쁜 설교는 소경이 소경을 가르치는 경우다. 그러면 교회는 맹신과 광신과 등신을 넘어 아예 실신한다. 특히 강남에 이런 교회가 제법 많다. 초대형 건물에 맹신도가 우글거린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제발 설교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신성모독이다.

"설교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독보적인 직통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 존 스토트(John Stott)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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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이러지? 2017-06-01 12:13:44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전달하는 전령이나 연락병의 역활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팍 와 닿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