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찬양 다시 불러보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찬양 다시 불러보기
  • 김동문
  • 승인 2017.06.09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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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진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졸지도 자지도 않는 존재로 호루스 신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고대 이집트의 거의모든 관 겉에, 그리고 곳곳에 부적처럼 는 이 눈이 그려져 있었다.

시 만큼 공감되는 문학 장르도 없고, 시 만큼 시인의 의도를 오해하기 쉬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성경에 담긴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자리에서 시인의 시선과 '감'을 잡는 수고가 다른 것보다 더 필요한 것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 가운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가 있다. 구약성경 시편 121편이다. 그 시를 중동 시대를 살던 이들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자. 그리고 다시 노래하자.

1. 뜻이 모호하거나 눈 앞에 그려지지 않는 구절 앞에는 멈춰서면서 시편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구약성경 시 121편)

이 시는 1,2절은 시인 자신을 '나'로, 3-8절에서는 이스라엘을 '너'로 지칭하는 것 같다.

2. 나를 주어로 이 시편 다시 읽으면 어떻게 다가올까? 시인이 말하는 '산'은 어디일까? 아브라함의 추억이 담긴 그 모리앗산인가? 아니면 시온 산인가? 성전에 오르면서 지은 시라는 부제를 떠올리면, 성전이 자리한 곳,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산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이 살던 그 옛날 오늘날의 레바논에서 이집트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북방 산의 신 바알의 존재감이 적지 않았다. 풍요와 번성을 안겨다주는 바알, 그로 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곳곳에 산당이 세워지고, 그 이름은 왕의 이름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 바알이 아닌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고백은 그 시대의 주류, 관행, 의식, 그 세대를 거부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바일이 아닌 여호와!

그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올라가는 시인의 눈길을 따라가 본다. 성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쪽에 자리한 광야를 연떠올리는 시인의 손길을 쫓아가본다. 그 곳은 낮의 뜨거운 햇살과 밤의 달로 표현되는 추위가 가득한 땅이다. 그곳은 광야, 특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규정된 그 남방(네게브) 광야 지역이다. 그곳은 악한 자의 현실적 위협인, 맹수의 위협과 강도의 위협, 추위와 더위의 위협이 가득한 땅이다. 이 모든 것으로 부터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한다.

3. 나라 또는 공동체 이스라엘 떠올리며 이 시편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고대 근동에는 대부분의 신은 먹고 자고, 졸고.. 그야말로 인간의 속성을 다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졸지도 자지도 않는 신의 개념이 이집트에 있었다. 바로 '호루스의 눈'이 그것의 하나였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제일 필요했던 육신의 보호는 미이라(미라)로 시신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이 미라를 넣은 관에는 호루스의 눈이 세겨져 있었다. 자지도 졸지도 않는 언제나 뜬 눈으로 그 죽은 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호루스의 눈이 뜬 눈으로 미라를 지켰어도 미라는 도난당하거나 훼손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고대 근동은 달 신이 상징이 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태양신을 으뜸신으로 하는 이집트 사이에 자리했다. 이스라엘, 요르단, 아라비아 반도 등은 두 문명과 제국이 각축을 벌이는 그 현장이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글 참조) 언제나 그 두 제국으로부터 받는 위협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위협이 이스라엘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4.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이 시편을 다시 읽는다는 어떤 고백이 가능할까? "여호와는, 너(이스라엘)를 지키시는 이시라." 그 광야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은, 그 고통을 공감하는 시인, 그런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을 떠올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눈앞에 구체적으로 다가온 그 환난이, 이 시를 읽는 우리에게는 추상적이며 관념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이집트도 메소포타미아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지키시는 이스라엘!

2017년 나의 도움을 어디에서 구할까? 오늘의 바알을 부인하고 여호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교회를 어떻게 교회를 지킬 수 있을까?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은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그 고백을 담아 다시 이 노래를 불러본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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