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에서 베다니까지,
베다니에서 베다니까지,
  • 김동문
  • 승인 2017.07.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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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는 음성 나환자촌 같은 곳?
처음 익은 열매(조생종 무화과)가 가득 맺힌 봄철의 한 무화과나무. 모든 무화과나무가 이렇지는 않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그 때 그 자리’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이 있을까? 나는 성경 속 현장에는 성경 본문의 진실성 또는 정확성, 세밀함을 짚어볼 수 흔적과 증거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지리적 환경, 위치, 동물과 식물, 계절, 일상생활, 등장인물과 시대의 정치 사회적 배경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성경 본문 읽기를 하는 수고는 피해서 안 될 번거로움이라 생각한다.

최근 아래와 같은 글을 읽었다. 이 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설명이 담겨있다. 이 익숙한 그러나 동의하지 못할 주장을 접하면서 그래도 다시금 베다니 예수를 묵상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예수님은 베다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벳바게는 히브리어 ‘베이트’(집)와 ‘파게’(첫 무화과 열매)가 합쳐진 ‘베이트-파게’(첫 무화과 열매의 집)입니다. 베다니는 ‘베이트’(집)와 ‘테에나’(무화과)가 합쳐진 ‘베이트-테에나’( 무화과 동네)라는 뜻입니다.

첫 무화과열매는 과수원의 주인 입장에서 보면 상품성이 떨어지므로 일일이 따는 수고를 덜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들이 공짜로 먹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동네로 가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풍자와 유머입니다. - 뉴스앤넷(2017.07.25.)

겨울에서 봄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 절대 다수는 절대 빈곤에 시달렸다. 종자로 사용할 씨앗이 전부인 것은 그나마 여유로운 처지이기도 했다.

무화과나무 저주사건(마가복음 11:12-25) 현장으로 같이 들어가 보자. 시간적으로는 우리말의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라 할 수 있는 어려운 시기였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땅에 살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어김없이 춘궁기가 있었다. 지난 해 가을에 마련한 양식이 바닥나고, 유월절 전후하여 수확할 밀과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시절이면 절대 가난에 허덕이던 대부분의 서민들이 여지없이 넘어야 하는 고비였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에게 비도 눈도 내리는 계절은 춥고 배고픈 시기였다. 대개 겨울 농사가 없기에 포도원일도 없고 밭일도 별로 없었다. 집짓는 일도 많지 않았다. 목축도 집 주변에서 이뤄지기에 일손도 많이 필요 없었다. 날품도 팔 수 없는 이들에게 겨울은 너무나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2월이 되고 3월이 되면 유대 산지와 광야는 들판이 풀이 돋고 들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 계절은 또한 다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 서민들은 종자로 사용할 아주 작은 분량의 씨(곡식)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여유로운 살림살이였다. 지금 먹고 죽을 것도 없는데, 그것을 밭에 뿌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그 고통스런 장면을 시인은 이렇게 담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서 벳바게를 지나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 성으로 이동하던 길. (ⒸIsraelandyou.com)

이 계절에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와 벳바게 그리고 감람산, 예루살렘이 오늘 이야기에 등장한다.

무화과, 처음 익은 열매, 여름 실과.. 이것이 모두 무화과열매를 뜻하기도 한다. 일반 명사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소화제하면 그것? 감기약 하면 바로 그것? 콜라하면 그것?) 봄철 무화과는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기에 처음 맞이하는 과일(열매)였다. 그랫 처음 익은 열매로 적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종려나무 등의 ‘처음 익은 열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다른 모든 나무보다 가장 먼저 열매를 맺는 무화과, 그 무화과의 처음 익은 열매였다. 그래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봄철 무화과, 달리 표현하면 조생종 무화과열매인 것이다.

돌무화과(삭개오의 뽕나무 이야기에 나오는 그 뽕나무이다.), 그 열매 모양은 무화과와 비슷하나 맺는 방식과 상태가 다르다.
 

그런데 모든 무화과가 처음 익은 열매(조생종 무화과)를 맺는 것은 아니다. 봄에도 열매를 맺고 여름에 제대로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는 많지 않았다. 무화과나무 품종 중에 그런 나무들이 있는 것이다. 2-3월 경에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요르단 지역을 둘러볼 때도, 대부분의 무화과나무가 여전히 말라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나무들과 특정 지역의 무화과나무에서는 잎도 눈에 뜨지 않는데, 무화과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봄철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지 않다, 무성할 수 없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조생종 무화과인데, 그것조차 헐값은 아니었다. 귀한 음식이었다.

무화과를 떠올리면서 돌무화과나무(개역성경에 뽕나무로 번역됨)가 같이 떠오른다. 유사 무화과나무 열매가 바로 돌무화과나무 열매이다. 아모스는 이 돌무화과나무를 키우던 농부(뽕나무를 배양하는 자 : 아모스 7:14)이기도 했다. 만생종 무화과(여름실과), 조생종 무화과(처음익은 열매), 돌무화과(뽕나무) 등은 저마다 값 나가는 과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익은 열매'를 상품성 낮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시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벳바게는 조생종 무화과나무가 많기로 소문난 장소였다. 마치 석류골, 밤골, 대추골 같은 이름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행자들이나 그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은, 그곳에 가면 그래도 먹을 것을 챙겨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곤 했을 것이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 (ⒸWordlive.org)

그렇다면 베다니는 어디일까? 베다니는 어떤 곳이었을까? 요한복음에는 두 곳의 베다니가 나온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와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이다.

예수 시대는 레위기 정결법이 집행되던 시기였다. 신체의 정결법(레위기 13:1-46)을 따라 나병환자 등 공동체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는 이들은 제사장으로부터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 격리 상태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일단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아니었다. 또한 그 병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재심 판결을 받기까지 격리된 상태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들이 머물던 곳은 어디였을까? 이 또한 예루살렘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병 환자 등으로 의심을 사는 자나 완치를 주장하는 이들 모두는 스스로 마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머물던, 대기하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였다. 그래서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동네’, ‘아픈 자의 마을‘이었다.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마가복음 14:1-11)도 이곳 베다니 주민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음성나환자촌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요단강 건너편'(Perea)지역의 한 장소였다. 요단강 건너편 지역은 북쪽으로 그릿 시냇가 근처에서 남으로는 아르논 강 근처에 이르는 지역을 뜻한다. (ⒸLanexdev.com)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요한복음 1:28) 지역은 광야지역이다. ‘요단강 건너편’ 이라는 표현도 특정 지명을 뜻한다. 마치 한국에서 영동, 영서 지방이 고개 오른쪽 왼쪽이 아니라 대관령 동쪽, 대관령 서쪽 등 구체적인 지역을 일컫는 말인 것을 안다. 이처럼, 요단강 건너편은 그릿 시낸가 정도에서 아르논 강 사이의 지역을 뜻하는 베레아(Perea)였다. 이 가운데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사해 가까운 쪽, 니므림 물과 요단강이 만나는 주변 지역을 뜻했다. 환경적으로 여름실과(만생종 무화과)가 드문 지역이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로마 지배에서 공동체 안에서 경계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 주류로부터 내몰렸던 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이 몰려 살던 곳이었다.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요단강 변의 마을이었다.

예루살렘에서 감람산과 그 뒤로 벳바게, 베다니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그 멀리쪽으로는 해돋는 땅 모압 산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요한이 나사로 부활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예수가 머무시고,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나사로가 죽어간다. 베다니에 계신 예수, 베다니에서 죽어가는 나사로, 베다니에서 베다니로 올라가시는 예수,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 예수는 베다니의 예수였다. 이렇게 두 베다니를 대비시키고 있다. 성경의 땅은 성경 내러티브를 이해할 수 있는 디양한 현장 증거를 갖고 있다. 어떤 점에서 성경 본문은 그 때 그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초대장인 것이다. 초대장의 디자인과 문체, 재질 등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받은 시간과 장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 속에만 시선을 멈추지 말고 그 때 그 자리에, 당사자의 시선으로 성경을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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