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죄인가?
가난은 죄인가?
  • 신기성
  • 승인 2017.08.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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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비난은 정당한가?
ⓒcalfocus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와 카이저 페밀리 파운데이션(The Kaiser Family Foundation)이 공동으로 빈곤의 원인에 관한 견해를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다.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acts-of-faith/wp/2017/08/03/christians-are-more-than-twice-as-likely-to-blame-a-persons-poverty-on-lack-of-effort/?utm_term=.eb46892a6877

질문은, “만약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인가, 아니면 어려운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결과가 미국인들이 빈곤을 바라보는 중대한 지표라고 표현했다. 미국 성인 1,686명이 이 설문 조사에 참여했다.

조사 결과,  빈곤의 원인이 각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비율이 비기독교인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인들, 특히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서 가난이 각 개인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침례 신학교의 알버트 몰러(Albert Mohler) 총장은 “기독교들은 가난의 원인이 일하려고 하지 않거나, 현명하지 않은 경제적 결정을 하거나, 건실한 가정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덧붙여서 기독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가난은 꼭 가난한 그 사람의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죄 때문이라는 것인 분명하다고 한다. 에덴동산에서는 가난이 없었고 타락한 이후에 가난이 생겼기 때문이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기독교인들 중 46%와 비 기독교인들의 29%가 가난을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53%가 본인의 책임으로 생각했고, 주변 여건 때문이라는 응답은 41%였다. 가톨릭은 50%와 45%였다. 무신론자들의 경우는 65% 대 31%였다.

 

신학적 논쟁

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자, 감옥에 갇힌 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 보다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성경구절을 더 많이 인용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부와 빈곤에 관해 연구해온 역사학자, 헬렌 리(Helen Rhee)는 부에 대한 기독교계의 의견이 갈라진 첫 번째 이유는 성서 해석에 따른 것이고, 두 번째는 20세기 초의 신학적 분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지난 세기에,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지지하는 그룹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보고, 계시록에 기록된 믿는 자들의 휴거와 불신자들의 환란이 곧 있을 것으로 봤다. 후천년설(postmilliennialsm)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평화의 축복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전천년설을, 보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후천년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방식도 서로 다르게 되었다.

후천년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의한 경제 구조를 해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반면에 전천년주의자들은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가능한한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 박사는, “전천년주의자들에게는, 세계는 벌써 구제불능이며 상황은 갈수록 더 나빠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개념은 분명하지 않다. 앞으로 그런 세상이 올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복음주의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끝이 곧 올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인격적 태도를 고치는 방식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경제적 구조를 바로잡는 것보다 그 사람 본인에게는 훨씬 더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인 몰러는,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빈곤을 다루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을 가난에 빠트린 죄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일 수 있다고 부언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좀 더 자주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죄의 구조적 측면을 잘 이해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력의 부족 때문?

사우스 캐롤라이나 오렌지버그의 작은 타운에 거주하는 25세의 줄리사 리드(Julisa Reed)는 “가난은 전적으로 노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이런 견해가 미주 흑인 침례교인(African American Baptist Congregation)이 대다수인 그녀의 교회에서 배워온 시각이다. 그녀는 종종 가난한 사람들이 성실히 노력해서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영적인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설교를 들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교회에 온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 우리가 주님의 빛 안에 거한다면, 그리고 적어도 올바른 길에 서 있으면, 포기할 가능성은 더 적어진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은 그 분의 계획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녀의 개인적 경험일 뿐이다. 가난의 원인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치, 사회, 경제 제도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구조적 문제

ⓒPeterson 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PILE)에 따르면, 지난 40여년간 생산성은 1.5배 가까이 성장했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1970년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생산성이 증가했으니 전체적인 부는 성장했지만 그 부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의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50% 사람들의 소득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제쳐두고 개인 탓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동영상에 나온 뉴저지의 한 근로자의 예에서 보듯이 일주일에 40시간씩 연간 52주를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도 연간 수입이 $17,000에 불과하다. 뉴스에 따르면, 뉴저지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가정당 연간 최소한 대략 $28,000정도가 필요하고, 최저 생계비를 받는다면, 일주일에 2-3곳의 직장에서 60-70시간 정도를 일해야 살아갈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주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동차를 소유할 형편이 안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출퇴근에 차를 소유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때로는 식사를 거르기도하고, 식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에 한끼만 먹기도 한다. 렌트비를 절약하기 위해 여러명이 방을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

2006년 기준으로 미국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연간 수입이 약 1천100만 달러라고 한다. 일반 직장인 연봉의 364배이다. 더구나 하위소득자들의 연간 수입은 평균 수입보다 훨씬 낮으니 빈부의 격차가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하지만 그 청년은 근심하며 물러갔다. 오늘날의 부자들은 이렇게 항의할지 모른다. ‘주님 저들이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가난한 것을 제가 왜 도와줍니까? 저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았습니다’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비난보다는 전인적인 구원으로 초대해야만 하는 형제, 자매들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한, 빈부의 격차가 더 커질 것이고, 부자 나라에서도 가난은 대물림될 가능성이 더 높고, 가난한 나라는 더욱 더 가난해질 것이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을 구하기 어렵고, 취직을 해도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부에 관한 종말론적 심판을 말씀하셨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1-45)

시은소교회 김성길 원로목사의 “부잣집 개” 발언이 논란이다. 공관병에 대한 갑질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박찬주 대장을 옹호하면서 나온 말이다. 장군한테서 ‘을질’을 당하는 것이 고된 훈련을 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란 뜻이다. 창군 이래로 계속되어온 이런 전통은 잘못된 것이니 고쳐야 한다고는 했지만,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 부적절한 비유였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초대교회의 나눔의 정신이 회복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주님의 평화가 임하는 샬롬 공동체를 맛보길 기원한다. 세상이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부자들, 권력자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갈 때, 교회는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 책임이 있다. 빵이 먼저냐 복음이 먼저냐 하는 물음은 전천년설 후천년설 논쟁이 한창이던 20세기의 유산으로 묻어두자. 복음 없는 빵은 기독교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며, 빵 없는 복음은 위선적 본질을 들고 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빵과 복음이 함께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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