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방탕한자의 상징문화? 이방인의 문화코드?
술, 방탕한자의 상징문화? 이방인의 문화코드?
  • 김동문 편집위원
  • 승인 2017.08.27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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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은 우리의 금주나 음주를 논쟁할 근거가 아닐 수 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것이 귀족의 품격? 로마 귀족들의 음주 잔치(심포지움) 장면. 이탈리아 패스툼의 Diver 무덤 벽화(480 BC). (이탈리아 패스툼 국립박물관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of Paestum) 소장

술, 금주를 권장하기 위해서나 음주를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언급한다. 성경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의 표현이라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데, 성경 속 술이 지녔던 사회, 경제사적, 정치, 종교적 읽기도 필요하다. 의식주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시대 정신이나 정서, 이해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술, 2천 년 전 중근동과 유럽지역에 포도주(포도즙 수준에서 부터 포도주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등급)와 맥주, 아락(주)으로 부르는 증류주 등이 있었다. 술은 일반적으로 포도주를 지칭(포도즙 - 포도주)했다.

그렇지만 포도주는 일반인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어렵지 않게 소비할 수 있는 그런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이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이들의 문화적 상징물이었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송로버섯이나 어떤 종류의 특별한 것들.. 먹고 사는 것도 힘겨운 이들이 물 대신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그 배경을 짚어보자. 맥락은 의외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6장(19-34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의 말씀이 적혀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 3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살기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인데, 몸을 위하여 입는 것인데, 그 먹고 마심의 목적도 변했다. 입는 이유도 변했다. 의식주를 통해, 자기 과시, 자기만족, 품격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로마 귀족들의 먹고 마심 잔치 장면. 폼페이 'Casa dei Casti Amanti' 벽화(이탈리아 폼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있(었)던 반면에, 오늘 과연 먹을 수는 있을까 마실 수는 있을까 입을 수는 있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symposium'으로, 로마 문화에서는 'convivium'으로 부르던 마시는 파티, 먹는 파티가 대표적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 가득한' 문화였다. 이런 문화는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예수 시대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절대 다수였다. 하루 먹을 빵, 아니 빵 한 조각이라도 오늘 먹었으면, 그것이 감사이고, 기적이었던 이들이 많던 시대였다. 이들에게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마셔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할 것이 없었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것이었다.

없이 살던 이들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한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뭣이 중한지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이 시대는, 옷값이 사람 몸값보다 더 비싸게 사는 이들, 음식 값을 사람 목숨 값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품격이라는 이름으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로마 귀족들이나 권력자들의 문화적 상징과도 같았던 포도주,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어떤 특권층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방탕한 것이었다. 없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못 느끼는 이들의 술 취함은 그야말로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었다.

먹고 마심은 특권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Monterozzi 무덤 벽화(480–450 BC.)의 한 장면.

그런 삶을 살 수도 없는 이들이 에베소서에 나온 이 편지를 들었던 이들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편지를 누가 써 보냈다고 하면, 무엇을 느끼겠는가?

"여러분들 송로버섯과 샥스핀으로 배 채우지 마세요. 그것은 방탕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2천 년 전 바울이 쓴 편지 에베소서 5:18절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금주나 음주를 논쟁할 근거 본문은 아닌 것 같다. 시대성, 역사성을 소홀히 한 채로 손쉽게 읽는 성경이나 역사 이야기는, 위인전이나 교훈서, 동화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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