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모신 곳은 초막도 천국이라더니'
'예수 모신 곳은 초막도 천국이라더니'
  • 정기호
  • 승인 2010.03.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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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무소유의 근본인 예수를 따르자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마 5:3)고 가르치심으로 기독교는 무소유의 종교임을 천명했다. 불가에서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과 무소유를 강조한다. 

'무소유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라는 말 속에 기독교는 소유 즉 번영과 성공의 종교라는 환상에 젖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 두 번 나오는 '생육과 번성'이라는 말을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편협하고 이기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생육과 번성'을 오로지 나와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에만 적용해, 기독교를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이기적 종교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비호감 집단이자, 반사회적 집단으로 전락해, 전남 광주에서는 교회 입당 반대 운동까지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그대로 즉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관리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인위적으로 탐욕의 신(금송아지)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고 새로운 모세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트리면서 하나님의 뜻(말씀)을 거역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얼마나 고집 센 백성인지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백성이 그토록 제 고집만 부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좋다. 나도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나를 붙잡지 말라"(출 32:10)고 하셨다. 생육과 번성을 곡해한 인류가 창조의 질서를 계속 무분별하게 파괴하기를 그치지 않고 '제 고집만 부리면' 엄청난 재앙이 지구촌에 임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생육과 번성이라는 논리로 '창조의 질서 즉 지구환경 파괴의 주동자'가 되었다. 따라서 지구촌은 암 말기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의 후손에게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유산으로 물려 줄 수밖에 없게 된 부끄러운 조상이 된 것이다.

마구잡이식 개발로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지구촌 전체에 몸살을 앓게 하여 지구촌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할 수밖에 없다. 세계 최강 국가라라고 자긍심이 강한 미국의 어린아이들이 환경 호르몬에 10명 중 9명이 오염되어 있다. 보건 당국은 플라스틱 젖병을 더 이상 어린 아이들에게 노출시키지 못하도록 부산을 떨지만 생산 단가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의 형편이 이러하니 제3세계 아동들의 형편은 어떻겠는가.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어 재난이 잦았던 지역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치료될  수 없는 질병과 이상 기온 현상이 나타나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소유에 목을 매는 것과 반대되는 성경의 근거는 청지기 사상이다. 청지기 사상은 "주인의 동산과 부동산이 다른 곳으로 새어나거나 낭비되지 않도록 선한 마음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읽어내는 데서 비롯된 오해다.

즉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 즉 하나님나라를 선한 청지기 정신으로 보호하고 관리하라는 뜻의 비유다. 예수의 비유는 비유일 뿐 현실의 세계는 아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의 빠른 이해를 위하여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나라 즉 천국에 대하여 설명했다.

여기서 우리가 공관 복음에 나타나는 수많은 비유를 현실로 읽어내는 비현실성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가장 큰 오해는 크리스천의 신분이 아들인지 신부인지 아직도 기독교는 구별해내지 못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의 경우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비유가 있다. 분명히 마태는 비유라고 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요한에 가면 비유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요한은 비유가 아닌 실상을 말했다. 비유와 현실을 구분할 줄 모르는 영적 분별력으로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보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다.

무소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실천가다. 그러면 지도자가 어떻게 무소유의 삶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가. 나눔의 실천이 대안이다. 예수님도 나눔을 행동으로 옮기신 분이다. 탐욕으로 가득 차 수십억 수백억을 거룩한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물림까지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만든 탐욕의 신, 즉 자기가 상상으로 만든 예수가 있을 뿐이다.

예수의 이름을 빌려 수백억의 축재와 대물림이 영웅시된다. 후배들은 이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추종하며 교단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계획과 음모가 무소유의 삶이 될 수 없다. 이들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일 따름이다.

예수께서 대물림이 필요하셨다면 결혼하시고 자녀를 낳아 대물림하셨을 것이다. 대물림의 제사장 제도는 율법에서 비롯된 것이요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율법을 단호하게 폐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지 않으신 것을 사람이 만들고는 예수의 뜻이라는 말은 반그리스도적인 행태다.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모방하고 그의 삶을 뒤따를 때 마음속에 세상(所有)이 주지 못 하 는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게 된다.

사람들의 상상과 망상과 허상과 생각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소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그리스도적이다. 소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짖고 가르침은 사람들의 귀에 즐거울지 모르나 모름지기 예수쟁이에게는 극약이다. 지구촌에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는 소유욕의 싸움이었다.

복음의 근본인 천국 지향에서 현세 지향으로 타락하여 지도자들의 말씀 끝에는 '축복합니다'가 유행병으로 번짐으로 기복주의로 중병이 든 자들이 치료받고 회생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으면 마음의 문을 닫고 설교를 듣지 않는 신자들, 기복주의로 오염되어 중병을 앓고 있는 신자들의 가슴은 후련해지지 않고 아멘의 응답이 없으니 지도자는 더욱 핏대를 올려가면서 '축복'을 외쳐보는 것이다.

물질과 풍요의 신인 바알 앞에서 450인이 해가 지고 밤이 새도록 '바알이여!'를 외쳤으나 응답이 없었음과 다를 바 없다. 그토록 전지전능하고 유능한 지도자들이 축복을 베풀었으나 솔로몬처럼 축복받은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으니 어이된 일인가? 유효기간이 지난 약을 투약함과 같은 현상이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의 모든 소유가 헛되고 헛되다고 그 짧은 전도서에서 39회나 되뇌었다.

예수는 몸으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버리고, 끊고, 죽임을 3년 반의 공생애를 통하여 보이심으로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것이다. 12제자들이 예수의 길을 뒤따랐다. 바울도 초대 교회 성도들이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재산을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빈털터리로 지팡이 하나와 한 벌의 옷과 신발과 한 개의 물통만 들고 거지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유대교와 로마 정권의 칼 앞에 무력하게 사형을 당했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 땅에서 줄 수 없는 '평화'가 임했기에, 하늘의 천사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들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예수에게 자기의 종이 되라고 '주여! 오시옵서서'를 외치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의 요구만 들어주는 사람의 종인가.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신은 예수가 아니어도 이름도 모르는 신까지 수억만 개의 신이 있다.

아나니와 삽비라는 탐심으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탐심의 해악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그러면 오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누구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도 마땅한 변질된 다른 것 즉 기복주의를 부추기고 가르치고 자신도 하나님의 축복의 전권 대사라는 자아의식에 사로잡한 엉터리 지도자들이다. 하나님의 창고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제물을 들여 놓아야 할 지도자들이 '병든 것, 다리 저는 것, 눈먼 것, 사람들이 보아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제물들'을 하나님의 창고에 들여 놓았다. 제단에서 짐승의 똥을 얼굴에 발라 불타는 제단에 던져 넣겠다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말씀을 외면하는 지도자들이다.

바울도 “탐심을 물리치라 이는 곧 우상숭배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조항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마음을 비워 예수로 채워 “주 예수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천국”임을 가르치거나 뒤따름을 거절하고 “복 주시옵소서”를 가르침으로 소유의 종교 즉 기복 종교의 선봉이 되었음을 개탄해 마지않는다. 무소유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은 아무리 외쳐도 헛되지 않다.

정기호 목사 / 기독교 대한감리회 은퇴 목사, ‘희망의복음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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