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으신 하나님’(2) - “사는 것은 아프다”
‘말 없으신 하나님’(2) - “사는 것은 아프다”
  • 김영봉 목사
  • 승인 2017.10.24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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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의 연속설교: 소설 <침묵>과 마틴 스콜세지 영화 <싸일런스(Silence)>와 함께 돌아보는 믿음의 여정, 그 두 번째 - 편집자 주

 

 

베드로전서 4:12-19

1.

지난 주,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통해 악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원죄로 인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악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적절한 상황만 조성되면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흉악한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악은 너무도 쉽게 전염되고 증폭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렇듯 악이 흉악한 모습으로 표출되고 전염되고 증폭되면 선량한 사람들, 특히 연약한 사람들이 그 악으로 인해 아픔을 겪게 됩니다. 죄악이 인간의 근본 조건이기에 아픔도 인간의 근본 조건입니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아픔을 강요하는 악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엔도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악은 ‘도덕적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악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악의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악도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그 예입니다.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겪는 아픔도 인간의 악의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것은 선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닥쳐오는 아픔입니다.

자연 재해로 인해 당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규모와 무게에 있어 다른 것에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캘리포니아 지방에서 수많은 가옥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산불이 그렇습니다. 매 년 초가을이면 미국 남동부 지방을 강타하는 허리케인도 그렇고, 잊을만하면 터지는 지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악의에 의한 것도, 하나님의 악의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무심히 일어나는 자연 현상입니다.

자연 현상은 그것 자체로는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닙니다. 그 현상이 나와 상관없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나와 상관없는 상태에서 보면 그 현상들은 때로 숨 막힐 정도로 경이롭습니다. 화산에서 솟아오르는 마그마가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토네이도 현상을 따라 다니는 ‘스톰 체이서’(storm chaser)를 아십니까? 한 번 보고 나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닿는 순간 악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이 증언하는 것처럼, 원죄의 결과는 해산의 ‘피’와 노동의 ‘땀’입니다. 피와 땀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사회를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땅을 오염시켰습니다. 인간이 당해야 하는 아픔의 원인이 다만 인간의 악의에만 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심성뿐 아니라 자연 질서까지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픔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인류 문명은 이 아픔을 치료하고 예방하고 제거하는 것을 위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TV 광고를 잠시 눈여겨보십시오. 절대 다수가 제약회사 광고입니다. 그 광고를 보다 보면 “웬 질병이 이렇게도 많나?”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만큼 아픔이 많습니다. 제약회사 광고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같습니다. “인간은 원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다. 아픈 것은 비정상이다. 아픈 것은 나쁜 것이다. 여기, 그 아픔을 제거하는 길이 있다.”

사람들은 아픔을 완전히 치료하고 제거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광고 메시지를 복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사실,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픔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남아 있는 아픔의 원인마저 제거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약속합니다. 그것에 속아 우리는 아픔 없는 인생이 가능하며 아픔 없는 인생이 가장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2.

이것은 거짓복음입니다. 아픔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는 제약회사의 거짓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이 진짜복음은 아픔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아픔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지만, 그 이전까지 아픔은 인간의 실존 조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픔 없는 행복’이 아니라 ‘아픔 안에서의 행복’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아픔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제거할 것이 아니라 아픔을 반겨야 합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자학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픔을 줄이거나 제거할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아픔을 제거할 수 있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아무리 많은 돈으로 안전장치를 하더라도 아픔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아픔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아픔은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픔 가운데 우리는 겸손해지고 진실해집니다. 그렇기에 아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새롭게 빚어지기도 합니다. 아픔 없는 기간이 지속되면 인간은 교만해지고 나태해지며 부패합니다.

 
손양원 목사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 기독교 역사가 배출한 세계적인 신앙 위인입니다. 그분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갇혀 지낼 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기도를 쓰셨습니다.

 

               빈방 홀로 지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 하여 네 식구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님은 아픔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쳐 올 때 환영했습니다. 그 아픔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보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분도 인간이었으니, 아픔을 겪는 것이 어찌 즐거울 수만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류가 겪는 아픔의 중심으로 당신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픔을 통해 고난의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고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인생에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며, 믿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픔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 거부할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벧전 4: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한 조물주에게 맡기십시오." (벧전 4:19)

 

사정이 이러한데, 오늘의 교회는 제약회사의 거짓복음을 받아 들여 번영의 복음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복음에 의하면, 가난한 것도, 병 든 것도, 사고를 당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모두 정상이 아닙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픔은 비정상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종류의 약함과 아픔을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오직 승리, 오직 성공, 오직 번영만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거짓복음은 주로 서구 교회에서 통용되다가 미국 교회에서 세련되게 포장되어 한국으로 수입되고 한국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기복주의’는 번영의 복음이 한국 토양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이 거짓복음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를 지배했고, 그 결과로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외형적인 성장이 무색해질 만큼 한국 기독교는 혹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허약하고 초라하고 모순적인 내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짓복음에 속아 아픔 없는 삶을 동경하며 살았기 때문에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조차도 아픔의 현실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게, 너무도 초라하게 무너집니다. 아픔 가운데서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인데, 아픔 앞에서 초라한 진상을 드러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했는데, 승리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으로 늘 승리하고 늘 성공하고 늘 번영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대하지 않았던 현실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현실망각적인 왜곡된 복음은 많은 믿는 이들을 현실 감각 없는 외계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3.

바로 이 점에서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대표작 <침묵>에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작품을 통해서 아픔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엔도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어릴 적에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전해 받은 서양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 같은 분, 준엄하신 분, 철두철미하신 분, 전능하신 분으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렇기에 약함과 아픔은 그 믿음 안에 살 자리가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픔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연약한 것은 죄였고, 아픔의 눈물은 수치였습니다. 아픔 없는 삶이 곧 ‘양복 입은 기독교’가 약속하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엔도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 시기를 아픔의 현실 가운데서 보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는 전쟁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아픔은 항상 곁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어머니가 겪는 아픔이 그에게는 깊고 진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버림받고 홀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추억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학교 무렵의 어머니,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모습으로 요약된다. 어머니는 찾기 힘든 하나의 음을 찾아서 바이올린을 계속 연주했던 것처럼, 단지 하나의 신앙을 추구하시면서 엄하고 고독하게 생활하고 계셨다. 겨울 아침 모든 것이 아직 얼어붙은 듯 한 새벽, 나는 종종 어머니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방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로사리오를 손가락으로 세면서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 되시는 분”, 147쪽)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의지하고 사시는 어머니에게서 아픔이 떠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서 엔도는 쓰린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어머니의 믿음은 갈수록 깊어졌으나 어머니의 아픔은 깊어지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은 아픔을 제거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셨다면, 어머니 곁에서 그 아픔을 같이 겪고 계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엔도는 믿음의 핵심을 꿰뚫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픔을 제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픔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픔 한 가운데 들어 오셔서 그 아픔을 품어 안으신 사건입니다. 아픔을 제거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픔의 한 가운데 임하셔야 했다는 사실은 아픔이 그만큼 인간 실존의 본질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픔 한 가운데 오셔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침묵>의 한 대목에서 엔도는 로드리고 신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는 누더기처럼 더러운 인간만을 찾아 구하셨다. 마루에 누워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 그리스도가 찾아 다녔던 것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은 창녀나 가버나움의 혈루병 여인처럼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들이었다.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181쪽)

 

 

이렇게 보면, <침묵>을 통해 엔도는 독자에게 인간의 아픔을 대면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런 아픔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은 더욱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픔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자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픔이 가득한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나가사키에 세워진 엔도 슈사쿠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다지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푸르기만 합니다.

이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려 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때로 그런 느낌에 압도됩니다.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내 삶은 깜깜한 암흑인데 세상은 너무도 눈부십니다. 나의 인생은 풍랑에 흔들려 파산 직전인데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합니다. 그럴 때면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엔도는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십자가에 달려 파도에 시달려 마침내 목숨을 잃었을 때 로드리고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신음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죽은 오늘도 여전히 바다는 어둡고 단조롭기만 한 소리를 내면서 철썩이고 있다는 변함없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뿐입니다. (94-95쪽)

 

4.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아픔의 현실을 대면하고 품어 안는 것입니다. 아픔을 대면하고 품어 안는다는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아픔을 줄이고 예방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악으로 인해 당하는 아픔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악의로 인해 당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자초해야 할 아픔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고 부른 아픔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자초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일본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가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서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아픔은 그 자체로 단순한 어둠이며 의의도 없고 비생산적”(101쪽)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아픔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벧전 4:16)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당하는 것”(벧전 4:19)입니다. 기타모리 가조는 바로 그럴 때 “우리의 아픔은 빛으로 화하며 의의도 획득하고 생산적이 된다”(101쪽)고 말합니다. 아픔을 통해 우리는 더욱 진실한 인간으로 정화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맛봅니다.

때로 아픔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그 아픔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취하시는 예외적인 행동입니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아픔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아픔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그 아픔을 통과해 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픔을 없애 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 아픔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이웃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아픔을 잘 못 다루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한 예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자기 아픔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아픔을 거듭 회피하고 외면함으로 인해 공감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라는 동안에 큰 아픔을 자주 겪다 보면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마음에 방어벽을 칩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마음을 무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혹은 너무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아픔의 현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선천성 무통각증(CIPA: Congenital Insensitivity to Pain with Anhidrosis)이라는 이름의 병이 있습니다. 아파도, 다쳐도, 불에 데어도 아픔을 못 느끼는 질환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처럼 무서운 질병도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뎌지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이요, 다른 사람에게도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라스베가스 총격 범처럼 끔찍한 사회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도 없고 공감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AI 즉 인공지능에 대한 보도를 자주 듣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2050년 이전에 AI를 통한 자율 운전이 보편화되어 사람이 운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노년의 남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병약해져서 운전을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위의 전망이 옳다면, 저는 정신만 온전하면 죽을 때까지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입력할 줄만 알면 되니 말입니다. 그 때가 되면 집집마다 로봇 인간을 사서 종처럼 부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로봇 인간은 능력 면에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능력자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로봇 인간들에게는 공감의 능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탁월하지만 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미래의 로봇 인간은 그것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공감 능력은 없는 초능력자가 만들어 내는 악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공감의 능력 즉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아픔에 대해 진실하게 아파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사람됨의 본질이며,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힘입니다. 아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진실하게 아파할 때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그 아픔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아픔 가운데서 십자가를 제대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과 이웃의 아픔에 대한 예민함의 수준이 우리 믿음의 수준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5.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 선생은 자신과 이웃의 아픔에 가장 예민하게 살았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분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분은 너무도 젊은 나이에, 너무도 많은 아픔을 마음에 품고, 너무도 아프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분이 젊은 날에 남긴 시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이웃의 아픔 그리고 조국의 비참한 운명으로 인해 아파하는 순결한 영혼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시 중에 ‘팔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시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등 여덟 가지 상태의 사람들을 말하면서 그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윤동주 시인은 두 번째 행 즉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따서 팔복을 이렇게 고쳐 씁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믿음을 포기하고 회의와 냉소의 감정으로 담아 이 시를 썼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믿음을 버렸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냉소와 체념은 윤동주 시인의 심성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심오한 성찰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픈 시대에 살면서 모두가 아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아픔의 깊은 내면을 더듬어 본 것입니다.

여덟 행을 모두 “슬퍼하는 자는”이라고 바꾼 것은 믿음의 가장 깊은 곳에 아픔과 슬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는 모두 아픔과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도 아픔을 품는 것이고, 온유한 것도 아픔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겉으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 뿌리는 아픔을 대면하고 품는 것에 있고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것을 바꾸어 마지막 행에서 “저희가 영원히 슬퍼할 것이오”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분의 육필 원고에 보면, 처음에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고 썼다가 지우고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바꾸었다가 마지막엔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위로였다는 뜻입니다. 다만,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윤동주 연구의 권위자인 김응교 시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래 윤동주의 심성은 슬픈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고운 마음이었습니다. 명동 마을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했지만, 그립고도 그리웠던 조국에 돌아온 그는 오히려 슬픈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 자신이 ‘슬픈’ 족속의 후예였던 것입니다.

윤동주는 이 슬픈 족속에게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필 기간을 거쳐 그는 전혀 새로운 인식에 도달합니다. 비극적이지만 그 슬픔에 함께 해야 그 길이 행복한 ‘팔복’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얄팍한 위로보다 슬픔을 몸으로 부닥치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슬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포월(包越)의 신앙을 깨달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사상> 2014년 4월호)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동주 시인은 그 젊은 나이에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알아 본 것이며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 본 것입니다. 아픔을 망각하게 하는 ‘환각의 복음’이 아니라 아픔 안에 깊이 들어가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맛보게 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자신이 당해야 할 아픔을 거부하지 않았고 이웃의 아픔을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아픈 인생은 비록 짧았지만, 남겨놓은 시들을 통해 사람됨의 본질과 믿음의 진리를 많은 이들에게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서 살고 계십니까? 혹시 육신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한 아픔 혹은 마음의 질병으로 인한 아픔을 겪고 계십니까? 아니면 관계가 깨어져 당하는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해 혹은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다가 아픔을 겪고 있습니까? 진실과 정의를 위해 일하다가 애꿎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픔을 당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왜 이런 아픔을 당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거나 불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아픔에 짓눌려 지옥같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아픔을 당할 바에 차라리 다 그만 두자는 유혹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아픔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아픔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원래 아픈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제대로 대하면 아픔은 기회가 됩니다. 새롭게 빚어지는 기회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보화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픔을 품어 안고 그 안에서 보화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요즈음 이렇다 할 큰 아픔 없이 살고 계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더욱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할 아픔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밤이 찾아 올 때 사용할 믿음의 기름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아픔을 찾아 감당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정작 큰 아픔이 닥쳐왔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아픔이 크지 않을 때 저 자신을 깨우치고 또 깨우치는 것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무너지는 신앙이 아니라 아픔 가운데서 더 빛나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한 편, 이웃의 아픔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가장 불행한 것은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공감의 능력이 없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나라는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지도자를 둔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의 마음은 이웃의 아픔으로 인해 잠시라도 깨어져 본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 혼자만이라도 아프지 않으려고 방어벽을 치고 살았습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마음이 엔도 슈사쿠가 가졌었고 손양원 목사님과 윤동주 시인이 가졌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 여리고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픔을 찾아 보듬어 안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마음입니다.

 

윤동주 (사진출처: dimg.tagstory.comdailypodarticle2785.jpg)

 

오늘 설교는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서시’를 기도로 삼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나날동안 우리 모두의 기도와 소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17년 10월 2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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