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교회개혁의 네 가지 과제
21세기 교회개혁의 네 가지 과제
  • 이병주
  • 승인 2017.12.14 02: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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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시대적 사명
본 글은 기독법률가회 이병주 변호사의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에 이은 두번째 글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시대적 사명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이천년 전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천년 후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이름으로 세상의 악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거꾸로의 기적을 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사회적 실패’를 극복하고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이라는 21세기 기독교의 신앙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체’, ‘신앙적 지식’, ‘신앙적 내용’ 및 ‘신앙의 제도’라는 네 가지 방면 모두에서 진지하고 실질적인 신앙적 개혁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신앙의 주체’에 관한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목회자들만 애를 쓰고 평신도들은 구경만 하는 극장식 기독교의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하고, 실제로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앉아서 신앙의 관중 노릇만 하던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제는 세상에서 일어나 스스로 활동하는 신앙의 선수 역할로 나가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일하고 평신도들은 사회에서 일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주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사회에서 일하는 평신도의 ‘과도한 신앙적 수동성(受動性)’과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의 ‘과도한 신앙적 능동성(能動性)’이 한국교회 신앙의 비사회성, 반사회성과 무사회성을 강화시키고, 500년 전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주의의 실현을 가로막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과 목회자의 일과 평신도의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를 훈련시킨 목회자들은 훈련된 평신도를 계속 교회의 신앙 일꾼으로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사회의 신앙 일꾼으로 나가도록 풀어주어야 합니다. 훈련된 평신도들도 계속 교회에서 교회 일의 보조 역할만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가 놓여있고 자기가 담당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신앙 일을 책임지는 신앙의 주인공 역할을 할 작정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회에서의 신앙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목회자들과 함께 대등한 신앙적 책임감을 가지는 평신도들이 대거 나서서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500년 전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만인제사장주의를 천명했을 당시, 루터가 실질적으로 사제의 역할을 담당해 달라고 호소하고 현실적으로 이에 응했던 평신도들은 당시 로마교황의 사제 임명권을 대체했던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 즉 평신도 제후들로 제한되었고, 이른바 만인제사장 직은 현실적으로 교회와 사회의 일반 평민 평신도들까지 확장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적 한계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그 이후로 500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의 평신도 지위는 가톨릭의 평신도 지위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고,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주의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명목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 교회의 일반 평민 평신도들의 지적, 교육적, 잠재적인 역량은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주의를 현실화시킬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종교개혁 500년의 한계를 넘어 루터의 꿈인 만인제사장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시대적 조건이 거의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여기가 로도스니 (교회 개혁의 적기이니), 여기서 뛰어야! Hic Rhodos, hic saltus!” 합니다.

 

둘째는 ‘신앙적 지식’에 관한 개혁의 필요성입니다.

목회자와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참여와 노력이 있어야 개인적 구원론의 비사회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악과 불의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법과 정치와 경제활동과 교육과 민주주의와 모든 사회적 고민과 논의들이 인간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죄와 악과 불의의 문제를 당면해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구원론의 복음주의가 인간의 개인적인 죄, 영적인 죄, 심리적인 죄에만 착안을 하게 된 결과, 기독교는 인간의 집단적인 죄, 사회적인 악과 현실적인 불의의 인식과 해결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도 관심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리적으로는’ 인간의 죄와 악을 가장 강조하는 기독교가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죄와 악에 가장 무감각한 종교가 되어 버리는 비극적인 역설이 발생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두 가지 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 중, 사람에 대한 지식의 상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체의 왜곡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논쟁을 벌이면서 평신도들이 담당하는 세상에서 배우고 연구해온 ‘사람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과 교회의 재산으로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는 신학만으로는 교회의 사회에 대한 지식의 추상성을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세상 학문 간에는 서로 할 얘기 자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착각입니다. ‘인간의 완성’을 추구했던 모든 세상 학문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전반 발전한 자본주의 제국들의 경쟁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문명적 파괴와 살육을 일으켰고, 20세기 내내 전세계를 혁명의 열정으로 흔들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가 끝나기 직전 참담한 실망 속에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에 대한 신념 또한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원리를 통해 그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세상은 다시 또 힘을 내서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부와 상품소비문명을 창조해 냈지만, 21세기에 들어와 모든 인간은 ‘꿈도 없이’ 더 ‘불안’해 졌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정치학의 열정과 경제학의 낙관과 철학의 자신감과 물리학의 신념이 함께 벽에 부딪치고, 모든 세상 학문은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이 역사를 통해 다시 전개된 것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학문은 하나님을 뿌리치고 인간의 힘으로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알기 위해 역사의 선악과 나무로 나아갔습니다(창세기 3:6). 많은 지식을 얻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학문은 결국 인간의 악을 보았고 인간의 벌거벗은 한계를 발견했습니다(창세기 3:7). 이런 맥락에서 세상 학문의 발전은 칼빈이 말한 ‘두 가지 지식’ 중 ‘인간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 단계에서는 ‘인간의 힘(하나님의 형상을 닮은)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었고, 뒷 단계에서는 ‘인간의 한계(인간의 악과 죄성)에 대한 지식’이 쓰라린 역사적 경험 속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학문의 발전을 일면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인본주의 세력의 책동으로 배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심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의 전개와 발전’으로 재해석하고 적극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 점에서도 하나님의 지식을 담당한 목회자와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식을 담당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새롭고 능동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한계’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매개로 한 기독교적 지식과 세상 지식 간의 대화는, 어딘지 물기 없이 건조해진 기독교적 지식의 내용을 다시 충만하게 만들고, 인간문명에 대한 신뢰의 막다른 골목(aporia)에 부닥친 것 같은 세상 지식의 막막함과 절망에도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 줄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는 ‘신앙적 내용’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자기사랑에 빠진 신앙이 아니라, ‘자기사랑과 자기부인’의 긴장 속에 놓인 신앙, 이웃사랑과 정의감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정의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이상주의적 지향과 인간의 현실주의적 한계를 함께 파악하고 소화해내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탐구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만의 노력으로는 소수의 예언자적인 목소리 역할은 하겠지만 한국교회 전반의 개혁을 이루어내기 어렵습니다. 신앙실천의 개혁은 보수적인 기독교인, 중도적인 기독교인, 진보적인 기독교인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신앙적 문제의식의 폭과 신앙실천의 조망이 넓어져야 합니다. ‘인간의 불의를 묵상하다가 사회적 불의까지 묵인하고 사랑하게 되는’ 보수적 기독교의 신앙적 태만과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다가 인간의 불의를 잊어버리게 되는’ 진보적 기독교의 신앙적 위험을 둘 다 극복하면서, ‘불의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기독교적 긴장을 팽팽하게유지하는 기독교적 사회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기독교적 정의관은 보수와 진보, 인간의 욕망과 정의감 사이에서 길을 잃은 21세기 사회의 혼란과 방황을 극복하는 일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자기부인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앞서서,우리들의 교회와 교인들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자기사랑의 압도적인 힘’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자기사랑에 빠진 죄인이었지만, 믿은 후의 교인과 교회는 자기사랑을 벗어나 ‘이미’무구(無垢)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착각이 우리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자각증상이 마비된, 자기사랑의 노예(奴隸)’로 만들어버렸습니다. 500년전 종교개혁자들이 밝혀낸 인간에 대한 절대적 절망(Total Depravity)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기 전의 우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 믿은 후의 우리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게도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와 세상은 악하지만 신자와 교회는 선하다는 착각과 바리새적 교만을 벗어나야 합니다. 500년전 교회의 위기를 파악한 종교개혁자들은 ‘믿지 않는 인간의 절망과 한계’를 밝혀내고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교회의 위기를 파악한 우리들은 ‘믿는 인간들의 절망과 한계’를 밝혀내고 그 해결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넷째는 ‘신앙적 제도’의 개혁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개별교회 중심의 제도적 틀로서는 ‘교회의 사회적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노력을 담아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개별교회는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그 신도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묶어 놓는 측면이 강합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칸막이가 없는 한국교회의 성도로서 교회의 사회적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별교회를 뛰어넘어서 폭넓게 연대하고 평등하게 노력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적 실천과 구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외에 사회적 차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지역별, 직종별로 새로 만들어 내고 교회 중심 신앙생활의 무사회성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 평신도 신앙운동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실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담으로 막힌 ‘조그만’ 대형교회보다도 훨씬 ‘더 큰’ 전체 한국교회의 신도로서 믿고 토론하고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며 실천하는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실천의 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 사랑하고 자기 교회에만 충성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맹목적 신앙과 교회적 이기심은 결국 2016년의 박근혜 사태에 필적하는 2017년의 명성교회 부자세습 사태를 만들어내서, 지금 한국교회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기독교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더럽히고 있습니다. 개별교회는 아무리 크고 잘 나간다 해도 전체교회의 일부분, 한 세포(細胞)에 불과합니다. 명성교회 같은 개별교회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전체 교회의 질서와 이익을 무시하면서 자기만을 주장하고 자기에 대한 충성과 존중만을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우리 몸의 암세포처럼 전체 교회를 죽이는 암세포가 됩니다. 명성교회의 부자세습 사태는 그 자체로서는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그것이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개별교회에 대한 충성의 끝’이 무엇인지, 과잉된 개교회주의의 종국적 결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구시대의 종말을 선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요구하는 이정표가 되었다는, 역설적으로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21세기 종교개혁의 과제는 교회의 울타리에 갇혀서 사회에 독을 품어내고 있는 교회의 사회적 실패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시켜 세상에서 움직이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500년의 관성과 타성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고쳐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까지도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한국교회의 젊은 에너지와 한국사회의 젊은 에너지라는 두 개의 강점을 가지고 나선다면, 한국교회의 회복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의 갱신을 위해서도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역할을 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과연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 특히 평신도들에게 이런 일을 해낼 의지와 능력이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파산 상황에서,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도 자기사랑을 추구하는 복음주의 신앙, 개인주의적이고 비사회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만 움직이고 실천하는 복음주의 신앙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서 ‘지극히 강고한 절대 수준의 수동성’, 즉 교회에 앉아서 듣기만 하는 신앙, 내 머리로 생각을 하지 않고 목회자가 씹어서 먹여주는 신앙만 받아먹는 태만한 신앙의 잘못된 습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고쳐질 수 있는가? 어렵지만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을 고칠 젊은 능력과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강점입니다. 하나는 이제 1백년이 갓 넘은한국교회의 아직 젊은 에너지와 신앙적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1백년도 안 된 한국사회의 젊고 활발한 민주주의적 역동성과 에너지입니다.

500년 전 16세기의 종교개혁은 한국교회가 독일교회와 미국교회에서 받아왔지만, 500년 후 21세기의 종교개혁은 한국교회에서 유럽과 미국교회보다 더 신선하고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열정은 유럽보다 강하고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적 역동성은 미국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의 모든 기독교인들, 특히 진지하고 주체적인 평신도들의 집단적 분발과 분기를 기대하며 촉구합니다. 목회자들은 많이 지쳐있습니다. 목회자들을 나쁘다고 욕하는 것만으로는 나올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책임 없이 힘을 비축해 왔던 평신도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맹목적으로 믿고 맹목적으로 충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눈과 내 머리로 하나님을 믿고, 내 손과 내 발로 세상 속에서 신앙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병주 변호사 / 기독법류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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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eia 2021-02-01 23:05:18
포스트 코로나시대 ..
무기력해진 한국교회의 개혁방향
계란으로 바위치기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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