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얼굴 하나 보는 것
화해, 얼굴 하나 보는 것
  • 손태환 목사
  • 승인 2018.01.04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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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컨퍼런스 2017 개회예배 설교
지난 달 27일부터 30일까지 메릴랜드 주 샌디 코브에서 열렸던 킹덤 컨퍼런스 2017 개회예배 설교를 맡았던 뉴저지 세빛교회 손태환 목사의 설교 말씀입니다. (편집자 주)

 창 33:1-11

1. 들어가며: 얼굴은 얼의 꼴

저는 아내와 얼굴이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연애할 때는 별로 못 듣던 말인데, 살다보니 점점 닮아가나 봅니다. 저는 부부가 서로 닮는다는 것이 근거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서로를 쳐다보잖아요. 그리고 같은 지점에서 웃고, 같은 지점에서 울고, 같은 이유로 화를 내고, 게다가 같은 음식을 먹고… 어떻게 안 비슷해지겠어요.

잘 알다시피, 얼굴이라는 우리 말은 본래 얼꼴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얼의 꼴, 즉 영혼의 형태라는 말입니다. 영혼의 모습이 그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누군가의 얼굴은 그의 존재 자체입니다. 잠언 27:19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As water reflects a face, so a man's heart reflects the man)”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매우 흥미롭게 번역을 했어요.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내 얼굴이 누군가의 얼굴에 비치고, 내 마음도 누군가의 마음에 비칩니다. 얼과 얼이 만나면서 서로를 비춥니다. 그러니 자주 얼굴을 보면 닮아가겠지요? 이번 킹덤 컨퍼런스 기간 동안 우리 가능한 많이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얼굴을 피하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화해, 얼굴 하나 보는 것”이라고 붙였습니다. 이미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제목은 함석헌 선생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뭐하려고 왔나? /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 남을 괴롭히는 얼굴 /별의별 얼굴이 다 있는데/ 참 평화로운 얼굴은 볼 수가 없구나//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함석헌/ 얼굴)

“우리가 세상에 뭐하려고 왔나?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언뜻 들으면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 고작 얼굴 하나 보려고 왔다는 말인가 싶어서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다음의 장면을 3:8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파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계속 나오겠지만, 히브리어로 얼굴을 ‘파님’이라고 합니다. 범죄한 인간이 처음으로 한 행동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었다는 말이죠.

그런가하면, 창4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 장면이 나오죠. 4:5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파님)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파님)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관계가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피합니다. 숨습니다. 안색이 바뀝니다. 얼굴을 돌립니다. 연인들끼리로 헤어질 때 그렇게 말하잖아요. “우리 이제 얼굴 보지 말자.” 집사님 한 분이 저에 대해 오해를 하셔서 크게 화가 난 적이 있으셨어요. 그런데 몇 달 동안 제 얼굴을 안 보는 거에요. 예배는 참석하는데, 예배 시간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셀폰만 보더군요. 제가 말을 걸어도 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겁니다. 관계가 깨어질 때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 얼굴을 마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화해 장면들 중의 하나가 등장합니다.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이 20년 만에 돌아와서 형을 만나고 화해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화해가 그리 쉽게 연출되지 않습니다. 창32장에 보면, 가나안 땅으로 거의 다 돌아온 야곱이 형 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얼굴을 뜻하는 그 단어 ‘파님’입니다.

먼저 32장 3절을 보시죠.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파님) 사자들을 보내며.” 여기서 ‘무엇에 앞서다’라고 할 때 얼굴을 뜻하는 ‘파님’이 쓰입니다. 형을 곧바로 대면할 자신이 없는 야곱이 사자들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알리라고 하죠. 그런데 사자들이 돌아와 하는 말이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해서’ 자기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지내게 되는데,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파님)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파님)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파님)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파님) 푼 후에 대면하면(파님)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파님) 함이었더라/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파님)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이 본문 속에는, 형 에서를 만나기 두려워하는 야곱의 마음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 계속해서 ‘파님’ 즉 얼굴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이 됩니다. 화해와 얼굴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죠. 결국 야곱이 두려워했던 것은 뭘까요?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죠. 다시 말해, 야곱은 자신이 형에게 저지른 잘못, 그리고 그로 인해서 깨어진 관계, 그 갈등의 상황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난 20년의 세월은 어쩌면 형의 얼굴을 피해 다닌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3. 화해는 다시 얼굴을 보는 것

그렇다면 결국 화해는 무엇일까요? 다시 얼굴을 보는 것이죠. 피하고, 숨고, 보고 싶지 않았던 그 얼굴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해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화해의 출발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 그걸 피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갈등(葛藤)이라는 한자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들어보셨나요? 갈등은 칡과 등나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이 칡이고, 등이 등나무이죠. 그런데 칡은 항상 왼쪽으로 감으면서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으면서 올라간답니다. 그러니까 이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면 풀기가 어렵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갈등이라고 하는 겁니다.(제가 원래 한자에 약한데 작년에 ‘공부’에 이어서 자꾸 한자 풀이를 하게 되네요).

사람들은 이 풀기 어려운 갈등 상황을 회피합니다.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인간의 갈등, 남북간의 갈등, 종교간 갈등, 인종/젠더/계층간 갈등,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 수많은 갈등 상황이 우리와 우리 주변에 놓여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회피합니다. 그 갈등과 긴장의 얼굴을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해를 향한 그 출발부터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남과 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습니다. 남북의 분단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형제끼리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 갈등이 지속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상대의 얼굴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거나, 심지어 그 얼굴을 악마화(demonize)합니다.

저는 어릴 적 북한 사람은 정말 얼굴이 빨간 줄 알았어요. 아니면 다 얼굴이 무슨 괴물처럼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화를 보면 다 그렇게 그렸었거든요. 똘이장군이라는 만화 기억나는 분들 계십니까? 김일성은 돼지로,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늑대로 묘사했습니다.(영상) 그들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절할 뿐 아니라, 아예 그 얼굴을 악마화한 것이죠. 옛날 얘기 같으십니까? 이 영상 밑에 이런 댓글이 있더군요. “돼지 김정은이 저기 있다. 엄청난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에니메이션이다.”

그래서일까요?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얼굴은 모든 윤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얼굴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것이야말로 용서, 정의, 평화, 그리고 화해, 이 모든 윤리적 가치 실현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유학생들은 경험이 조금씩 있을 텐데, 저는 유학시절 클래스에서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을 종종 느꼈습니다. 나는 분명히 거기 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내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마치 얼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Racism은 결국 상대의 얼굴을 정직하게 바라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Sunday는 가장 분열이 극심하게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얼굴색을 가진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모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나와 다른 얼굴들을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피하고 싶은 얼굴, 꼴 보기 싫은 얼굴, 원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북한 땅이 코앞에 보이는 철원군 동송읍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에 있는 비무장지대(DMZ)에 ‘평화 문화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 안에 존재하는 ‘국경선평화학교’가 있습니다. 정지석 목사님이라는 분이 교장으로 계신데, 우리나라의 분단의 현실을, 그 갈등의 얼굴을 가장 최전선에서 대면하고 있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원수로 여기는, 그러나 우리 형제들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그것도 총칼이 아니라 평화의 이름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화해는 바로 이런 이들을 통해서 조금씩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3. 가해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경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이야기는 주로 야곱의 입장에서 전개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일종의 가해자이지요.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에서는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어떤 마음으로 야곱을 만나러 오는지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에서는 20년 간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까요? 복수를 꿈꿨을까요? 400명을 이끌고 오는 건 그 때문일까요? 야곱은 형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하지만, 형이라고 야곱 얼굴 보기가 편했을까요? 그래도 400명 군대를 이끌 정도 힘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만일 정말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야곱을 만났다면, 아니 반대로 야곱이 탕자처럼 거지꼴로 돌아왔다면, 그 힘의 불균형 속에 용서와 화해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설령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런 용서와 화해는 괜찮은 것일까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읽기 힘들었던 책 중의 하나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성폭행과 강간을 당한 은수연이라는 작가의 글입니다. 물론 수연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필명입니다. 그리고 수연을 성폭행한 가해자는 바로 그녀의 친아빠입니다. 수도 없이 자신의 딸에게 매질을 했고, 강간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수연이 도망하여 경찰서나 상담소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거나 엄마를 불러 다시 집으로 가서 또 매질과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정확히 31페이지에서 악 소리를 내며 책을 짚어 던졌습니다. 수연을 때리던 그 짐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수요예배니까 갔다 와서 다시 보자.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그 다음 대목에서 수연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직업은 목사다. 그 사람은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수요예배를 인도하러 나갔다.’

저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수연에게 가해자의 얼굴을 대면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빠란 인간을 용서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그들이 화해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화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간신히 읽으며 저는 ‘수연이 적어도 자신과의 화해는 이루어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을 더럽다 생각하고 혐오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기록하고 세상에 그 악을 드러낸 그녀는 더 이상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화해는 얼굴 하나 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그냥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서 옛날 일은 잊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며 서로 악수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화해는 이벤트가 아니고 과정이며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 여정 안에는 절대 스킵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 참회와 용서를 통한 화해

창 32:20절을 보면, 형 만나기를 주저하는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앞에(파님)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파님) 푼 후에 대면하면(파님) 형이 혹시 나를(파님) 받아 주리라.” 이 구절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여기서 ‘예물’은 ‘선물’ 또는 ‘하나님께 드리는 offering, sacrifice(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형의 감정을’이라고 할 때, 다시 얼굴을 뜻하는 단어 ‘파님’이 쓰였죠. 그래서 그 부분은 직역하면 ‘형의 감정을’이라기보다 ‘형의 얼굴을’입니다. 그리고 ‘형의 감정을 푼 후에’라고 할 때 ‘풀다’라는 단어 ‘카페르’는 본래 ‘덮다(to cover)’ 혹은 ‘속죄하다(make an atonement)’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물로 형의 얼굴을 덮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면, 맨 마지막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고 할 때 ‘받아주다’의 원래 의미는 ‘얼굴을 들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 문장 전체를 직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선물로 형의 얼굴을 덮은 후에 형의 얼굴을 보면, 혹시 형이 내 얼굴을 들게 해 주리라”

이 구절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 과정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백성들, 그 예물을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속죄하시는(즉 그들의 얼굴을 들게 하시는) 하나님, 이런 속죄 제사의 과정을 연상시키는 말을 야곱이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지금 야곱은(혹은 이 사건을 기록하는 성경 기자는) 형과의 화해라는 이 여정 속에 참회와 속죄(용서)를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자신의 과거 잘못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으로부터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화해를 말할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소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이슈를 둘러싼 많은 목소리들 중에 ‘이제 그만 일본을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진심어린 사죄와 참회 없이 이루어지는 화해라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화해일까요?

19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 분리 정책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죠. 수많은 흑인들을 향해 참혹한 인종차별과 반인권적 만행을 저지르게 한 어파르타이트는 폐지되었지만, 흑인과 백인(피해자와 가해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과 긴장이 남아 있었고, 언제 서로를 향한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남아공은 저 유명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를 중심으로 그간 있었던 모든 인권 침해와 악행의 진실을 밝히고 동시에 피해자와 가해자들 사이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지요.

약 7년 동안 계속된 청문회에서 가해자들이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고백합니다. 백인 경찰은 수감자였던 흑인 여성 앞에서 참혹하게 고문했던 것을 고백했고, 자신이 죽인 흑인들의 배우자들에게 어떻게 그들을 죽였는지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7년 동안 무려 2만 2천 건의 진술을 통해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선택했습니다. 위대한 선택이었죠. 그러나 그들이 진실에 눈감았다면 그 화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하지만 늘 가슴 서늘하게 읽는 시가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죄>라는 시입니다.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PPT)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죄라는 말이 오염되어 그 칼날 같은 서늘함이 사라지고 무뎌질 때, 용서도 은혜도 화해도 함께 흔들립니다. 싸구려가 됩니다. 그래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라는 분은 “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고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야곱은 형과의 관계가 망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5. 화해는 하나님의 선물

그런데 여러분, 야곱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만, 과연 형이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물을 형에게 먼저 보내고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다시 한밤중에 일어나 가족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넙니다.

그리고 이제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시내를 건넌 후에 야곱이 홀로 남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말이 참 쓸쓸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처음 고향을 떠날 때처럼 이제 다시 혼자입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상상이지만, 야곱이 얍복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을까요? 속고 속이며 살아온 20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죠. 갑자기 하나님께서 끼어드십니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이 여정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야곱이 형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도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운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화해의 여정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은 왜 갑자기 야곱과 씨름을 하신 걸까요? 왜 유도가 아니고 씨름이냐고 묻는 게 아니고… 왜 야곱과 싸우신 걸까요? 참 어려운 본문입니다. 성경학자들도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서 처음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고등부 선생님과 타툰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부 교사 모임이었는데, 토요일 고등부 예배에 참석 못하는 학생을 위해 주일에라도 잘 챙겨달라는 고등부 전도사님의 말에 ‘내 새끼도 잘 못 챙기는데 남의 자식까지 주일 날 챙겨야 하냐’고 하더군요. 저도 그 때 혈기 왕성하던 20대라서 “선생님 자식만 소중하고 영적인 자식은 안 중요하십니까? 한 번 더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냥 안 넘어가겠습니다”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그 선생님이 제 얼굴을 안 보더군요. 저도 안 봤습니다. 서로 얼굴도 안 보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1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회였는지 무슨 모임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교인들이 한 30명 정도 모인 자리였는데, 부목사님께서 거기서 작은 게임 인도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이 다 눈가리개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돌아다니다가 서로 딱 부딪치는 사람이 있으면 눈가리개를 풀고 그분과 서로 손잡고 기도하는 일종의 게임이었습니다.

더듬더듬하면서 돌다가 어느 분 손을 잡고 눈가리개를 풀었는데, 제가 누구와 부딪쳤는지 상상이 가시죠? 딱 그 선생님이더군요. 그 순간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뭐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혹시 그분이 먼저 할까 봐, 얼른 그분 손을 잡고, “선생님, 제가 그 동안 미안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분도 똑같이 미안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붙잡고 한참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제가 느낀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화해는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구나. 서로 외면했던, 회피했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그것이 화해인 것이죠. 둘째는, 그날 저녁에 기도실에서 있었던 그 우연 같은 사건이 지난 1년 동안 그 선생님과 저와의 관계를 마치 집약적으로 재현한 퍼포먼스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그 상태가, 마치 그 동안 서로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눈가리개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던 저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죠. 저는 그것이 저희의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싸운 이 장면도 그와 같은 것 아니었을까요? 야곱은 평생 속고 속이며 싸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뱃속에서부터 형과 씨름했고, 장자권을 얻기 위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형의 얼굴을 피하여 20년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삼촌 라반에게 속임 당하며 치열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하나님과의 씨름은 이런 야곱의 인생을 재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아니였을까요?

게다가 여러분, 처음에 야곱은 그를 공격한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틀림없이 에서이거나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해도 그건 곧 에서나 나름 없는 것이니, 야곱은 에서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곧 야곱은 그가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에서와 싸우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평생 에서를 속이고, 빼앗고, 그래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할 대상은 그저 에서인 줄 알았는데, 이건 그저 에서와 야곱 간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야곱 간의 싸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깨어진 관계 속에서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화해를 위한 우리의 여정 속에 개입하십니다. 이번 킹덤의 주제 성경 구절이 어딘지 아시나요? 고후 5:18-19절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화해를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화해의 제자도>라는 책에서도 말하듯이, “화해는 우리와 관련된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마치 선교가 교회의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교이듯이 말이죠.

저는 아버지와 20년을 싸웠습니다. 아버지 얼굴 보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화해를 하게 되었는데, 참 신기하죠? 지금도 아버지 기일이 되면 화해하기 전 아버지 얼굴이 아니라 화해 이후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버지와 화해 이후 아버지 얼굴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6.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

저는 화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붙인 데서 또 한번 확인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았기 때문에 브니엘이라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위험할까요?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얼굴이죠. 모세도 하나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았다면, 야곱은 이제 에서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지요. 하나님의 얼굴을 본 덕분에 야곱은 참회와 화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역사적인 시가 있지요.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중략)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 주장하는 일이라고 /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 있다고 생각하나 /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 그야 하는 수 없지 /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문 목사님은 1989년 초에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약 두 달 뒤 평양으로 들어갑니다. 두렵지 않았겠냐고요? 저는 문 목사님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분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저기 저편에 설령 원수가 서 있다 하더라도 두려울 리가 없지요. 더구나 한 민족 한 형제의 얼굴을 보는 일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도 분명 달라졌습니다. 33장 1절에 보니, 야곱이 에서가 400명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걸 보고, 가족들을 배열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소유를 앞서 보내고, 가족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맨 나중에 서던 찌질하고 비겁한 야곱이 아닙니다. 3절에 보니 그들을 뒤에 두고 자신이 그들 앞에서 나아갑니다. 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한 예물을 맨 앞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맨 앞에 섭니다. 야곱 스스로 속죄를 위한 예물이 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에서를 향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절하면서 에서에게 다가갑니다. 하나님 만났다고 참회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에서에게 철저히 사죄합니다. 그 때 에서가 달려와 그를 안습니다. 목을 끌어앉고 입맞추며 서로 부등켜 안고 웁니다. 야곱은 용서를 구하고 에서는 용서합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 보면서도 자주 우는데, 성경은 다 아는 얘기인데도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울컥합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화해는 서로 부둥켜 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1절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에게 예물을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미 에서는 용서했지만 받아달라는 요청이지요. 지금 야곱이 뭐하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야곱이 에서를 속여서 빼앗은 그 축복을 되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11절의 예물은 앞에서 쓰인 예물과 달리 ‘축복’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말로만 끝나는 화해가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입힌 해를 보상하는 차원까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겁니다. 예전에는 둘이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이 감격스러웠는데, 이제는 이 부분이 제게 더 감동적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참회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이어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죄를 고백한 가해자는 사면 받았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단지 참회의 고백을 들었을 뿐 그들을 위한 제대로 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며 투투 대주교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화해’라는 말에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그러니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말뿐인 화해로 끝나지 않고, 빼앗은 축복을 돌려주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7. 화해자, 얼굴을 살려내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럼에도 이 화해 이야기의 정점은 10절 하반부에서 야곱이 에서에게 건넨 말에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용서하는 에서의 얼굴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김기현). 화해는 외면했던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뿐 아니라, 그에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화해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시는 겁니다.

여러분도 많이 아는 이야기일텐데, 2010년 9월 충남 당진에서 20대 청년이 한 철강 회사에서 고철을 쇳물로 녹이는 일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용광로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용광로에는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이 들어 있어 숨진 이의 주검조차 찾을 수 없었지요. 그것이 기사로 알려졌었는데, 그 기사에 제페토라는 이름의 누리꾼이 댓글 형식의 시를 달았습니다.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시였습니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청년이 녹아 사라진 그 쇳물 함부로 쓰지 말고, 살았을 적 얼굴로 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가끔 어머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화해자로 산다는 것,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 산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요? 저는 이 시가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얼굴을 되살려 놓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아픈 이들의 얼굴을 살려내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잃어버린 소녀 얼굴을 살려내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얼굴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저 북한 땅의 형제 자매들의 얼굴을 되살리고, 없는 존재 취급받는 다카 청년들의 얼굴을 살려내고, 각종 포비아로 왜곡된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 모두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화해자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의 얼굴 하나 정직하게 보는 것이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 때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 말합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늘의 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화해자로 살아가는 모든 킹덤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참고서적

강남순, <용서에 대하여>, 동녘/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 지성사/ 김기현, <내 안의 야곱>, 죠이선교회/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비아/ 송강호,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IVP/ 에마뉘엘 카통골레, 크리스 라이스, <화해의 제자도>, IVP/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왜 용서해야 하는가>, 포이에마/ 은수연, <눈물도 만나면 반짝인다>, 이매진/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IVP/ 존 퍼킨스, <정의를 강물처럼>, 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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