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19일동안 북한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는 919일동안 북한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 양재영
  • 승인 2018.01.21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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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수 목사의 북한 체포 과정과 이후 생존기
본 글은 최근 <토론토 라이프>(Toronto Life)에 실린 임현수 목사의 “나는 919동안 북한의 감옥에 갇혔습니다”라는 제목의 기고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임현수 목사는 2015년 12월 ‘종신노역형'을 선고받고 북한에 감금된 이후 31개월 만인 지난해 8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캐나다로 돌아 왔습니다 - 편집자주

 

임현수 목사 (CBS 영상 갈무리)

물론 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한 사람의 권력아래 가장 고립되고 중무장화된 국가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감옥에 갇힌 외국인들의 이야기나, 정치적 라이벌이나 배신자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처형되는 과정에 대한 소식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 저의 관계는 독특했습니다. 저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곳에 원조를 하는 미시소거(Mississauga,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위치한 토론토 위성도시-편집자주)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제가 처음 북한을 방문한 것은 1996년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홍수로 농작물이 망가져, 5년간 1백만명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방문했을 때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이후 교회 회중들의 기부금으로 나선지역에 하나의 고아원과 다섯개의 데이케어 센터를 설립하는 것을 돕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희 교회는 겨울 잠바와 부츠, 안경 등을 기부했습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한 당국은 저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여덟채의 노인주택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선봉을 섰으며,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을 돕는 팀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농장을 짓고 북한인들을 고용해 농작물을 재배했으며, 하루에 40,000개의 라면을 만들수 있는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2대 도시인 함흥에 있는 주유소에 투자를 해 고아원을 위한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까지 저는 북한을 150여차례 방문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할 때는 종종 아내와 함께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교인들과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북한의 방문은 집근처 쇼핑몰을 방문하는 것처럼 일상화되었습니다.

2014년 말엽,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과거 중국에서 알게된 한국선교단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북한의 통상부가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습니다. 하루 코스로 여행과 관련한 대화일 것이라는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음해 1월에 어머니를 뵙기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하루 일정으로 북한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북한 국경 근처인 선양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저는 밤이 되기전에 서울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중국과 나선경제특구 사이에 있는 국경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곳은 북한땅으로 외국기업들이 비지니스를 할 수 있도록 울타리진 곳입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지키고 있었으며, 수십의 제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서류를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볼라가 창궐하고 있었음으로, 모든 외국인들은 21일간 검역소에서 격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을 여러번 방문했기에 검역없이 국경을 지날 수 있는 넥서스 카드(녹색의 ID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몇명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카드와 여권을 보여줬고, 경비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과시켜줬습니다. 제가 검역소를 통과했을 때 전에 몇번 만난적이 있는 정부관료들 몇몇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계획이 바뀌어서 평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하며 준비된 SUV를 탑승했습니다. 우린 17시간 정도 운전해서 평양의 한 작은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임현수 목사가 2007년 교회에서 시작한 라선 지역 농장에 씨를 심고 있다

북한은 매우 계층화되어 있습니다. 1천만 국민들은 충분한 영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평양 같은 곳은 호텔, 미술 갤러리, 잘 갖춰진 지하철 등 부유함을 자랑합니다. 저는 무척 배가 고팠기 때문에,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김치찌개와 갈비찜을 주문했습니다. 식사를 마친후 방으로 돌아와 누워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섯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한번도 본적이 없는 총으로 무장한 사복을 입은 비밀경찰들이었습니다. 그들중 한명이 강압적으로 문밖으로 끌고 가자 저는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무슨일입니까?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천으로 저의 눈을 가리고는 차량의 뒤쪽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에볼라 검역소를 지나쳐왔기 때문에  그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가렸던 천을 벗겨줬을 때, 평양 근처의 감금시설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한 젊은 남자가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가 정부 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텍사스 컨퍼런스에서 전한 설교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에서 김 패밀리를 신으로 섬겨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 생각하던 바입니다. 북한은 악이 거하는 곳이며, 김정은은 그의 부친이 했던 것처럼 백성들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 국민들에게 그를 신격화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젊은 남자는 “만약 신께서 허락하신다면...몇년 안에 북한은 복음화될 것이며 과것의 영광을 회복할 것입니다"라는 2010년 설교의 한 부분을 들이 밀었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고, 김정은은 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일간의 심문 동안, 그들은 제가 북한정권을 파괴하기 위해 누구와 모의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후 한 법률 판사가 와서는 저에게 국가의 최고지도자의 명예를 손상한 점과 정권을 파괴하기위해 종교를 이용했다는 점,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메시지를 유포한 점 등으로 기소되었다고 차갑게 말해줬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는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갑자기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저는 1986년 토론토 기독교컨퍼런스의 초청강사로 캐나다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그때 북쪽 도시들을 잠시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좀 피곤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이 들었습니다. 몇 시간 후 잠이 깨었을 때 제 차 옆에 캐나다 경찰관이 서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창문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때 “당신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깰때까지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경험은 저의 모든 것을 뒤바꾸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뇌물이나 더 한 것을 요구하는 한국과는 달리 캐나다 경찰이 보여줌 따뜻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캐나다로 영구 이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법의 균형을 잃어버렸을 때 진심으로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됩니다. 한번은 50세 정도의 검은 머리를 한 남성이 내가 머문 감옥에 들어와서는 자기를 국선변호사로 소개하고는, “왜 김정은 정권을 저주했는가?”라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북한의 사법시스템은 가찌이며, 누군가 저를 변호한다는 것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변호사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간단히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했고, 그의 방문은 아주 짧게 끝났습니다.      

-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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