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왜 자살을 정죄할까?
종교는 왜 자살을 정죄할까?
  • 신기성
  • 승인 2018.06.1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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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최근 패션 디자이너 케이트 스페이드와 유명 셰프이자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의 자살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가운데 미국에서의 자살률이 급격히 늘어간다는 우려스러운 보도도 나오고 있다. 한국은 높은 자살률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이미 오래됐다.

사진출처: YTN

<Religion New Service>는 Holy Cross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매튜 슈말츠(Matthew Schmalz)의 “종교는 왜 자살을 정죄하는가?”라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심지어 부자들에게조차도 삶이란 감당하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글을 시작한다.

미국에서 자살률이 높이지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진실이다. 지난 십년 동안 자살률은 거의 30% 가까이 올라갔고 특히 여성과 청소년층에서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개인과 가족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자살에 관한 윤리적 측면의 문제는 주요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이다.

 

누구의 삶인가?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신에게서 부여된 것이라는 이유로 자살을 정죄해 왔다.

유대 전통에서는 창9:5을 근거로 자살을 금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너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가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비록 요즘에는 약화되기는 했지만, 유대의 사회법과 종교법, 탈무드 등에는 일반 장례식에서 행하는 의식이나 예식을 자살한 사람에게는 금하고 있으며 유대 공동묘지에 안장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가톨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자살은 살인 행위이다”라고 썼다. 사살상 20세기 초반의 가톨릭 신앙을 보여주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서에 따르면, 자살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기독교식 매장이 거부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지금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는 “지옥”에서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에 근거해 자살의 죄를 범한 사람들은 제 7지옥에 갇히며 나무를 자르거나 가지를 칠 때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통적인 이슬람에서도 자살한 사람들의 운명은 비슷하게 비극적이다. 마호메트의 전승인 하디스(Hadiths)는 무슬림들에게 자살을 행하는 사람들은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옥에서 그들은 그들이 택한 자살의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고통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되어있다.

힌두교에서는 자살은 산스크리트어 “atmahatya”로 묘사하는데 문자적 의미는 “영혼 살인자”이다. “영혼살인자”는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카르마를 만들어내게 한다고 가르친다. 인도의 민간전승에는 자살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출생과 내세에 관한 힌두 철학에 따르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환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 또한 자살을 하거나, 부추기거나, 돕거나 하는 행위를 금한다. 왜냐하면 그런 자해적인 행위는 고통을 줄여주기 보다는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살은 가장 근본적인 불교의 가르침인 살생을 금하는 교리를 어기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타적 자살?

많은 종교들에서 전통적으로 절망에 의한 자살이 금지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공동체에 도움이 될 때나 더 큰 선을 위해서는 허락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공동체를 위한 혹은 보다 고귀한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자살을 묘사하기 위해 “이타적 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타적 자살”의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신을 위해 혹은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다.

최근에 프란시스 교황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oblatio vitae"라는 성인 목록을 추가했다. 개신교와 이슬람에서도 순교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이는 전쟁에서의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성 안에 포위된 십자군이 성벽 아래의 터키 군인들을 죽이기 위해 죽을 각오로 뛰어내린 경우 등이다.

불교 승려들이 베트남과 티벳 등에서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의미로 분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힌두교에서는 진리를 터득한 후 죽음에 이를 때까지 금식 고행을 하는 전통도 있다고 한다.

고대 힌두 전통에는 “sati"라고 하는 부인을 남편의 화장 장작더미에 함께 죽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전쟁에 패하고 여성들이 노예가 될 경우에는 여성 전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jauhar"라는 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예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죽음 그 자체보다 원칙이나 목적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자기희생은 자살로 여겨지지 않는다. 신앙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슈말츠의 주장이다.

 

자살 다시 생각하기

자살에 관한 전통적인 금지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좋은 소식은 오늘날 자살을 방지할 수 있는 자원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종교분야에서는 자살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보다 동정적이게 되었다.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불교, 힌두교 등은 모두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저자 슈말츠는 하나님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살을 신의 처벌에 관한 정죄적 입장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삶의 희망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슈말츠의 기고문 번역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의 상대적 박탈감과 이를 더욱 부추기는 양극화는 많은 사람들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간다. 집세를 내지 못해 자살한 세 모녀의 비극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가. 기독교의 우월성을 구원론적 배타성으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삶의 극단의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다가가는 마음으로 대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위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때에 따라서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한다. 오직 기독교만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신 하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배타성이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을 정죄만 하기 보다 절망의 시기에 찾아가 희망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 급하지 않을까!

원문출처: https://religionnews.com/2018/06/12/why-religions-of-the-world-condemn-su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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