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쳐들어 옵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는 영락없는 북한 여성의 목소리처럼, 빨갱이의 목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대학 신입생이 되어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보기까지 나는 광주를 몰랐고, 전두환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위기를 맞은 우리나라를 지켜 준 든든한 대통령이었습니다.그렇지않다면 그렇게 많은 목사들이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며 전두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목사는 거짓말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사람인 줄로 알았던 것이지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죽지않았다면 목사가 되었을 류동운 열사는 저희 학교 선배님이셨습니다. 지금이야 학교 안에 '류동운 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지만, 추모비를 처음 세울 때 전경들이 굴착기까지 동원해 학교까지 치고 들어와 학생들과 몇날 며칠을 대치하곤 했습니다.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지 않았는데 벌써 30년, 그 사이 당신들을 팔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꽤나 됩니다. 이른바, 변절자들이지요. 그냥, 자기들이 구국일념으로 그랬다고 끝까지 우기는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입니다.
당신들의 그 억울한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완성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란 왜 그리도 더딘 것인지, 지금은 당신들이 30년 전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던 그때만큼이나 가슴이 콱 막혀있습니다.대학 1학년 때, 당신의 묘지를 찾았지요.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경기도 성남에서부터 일주일 내내 걷고 또 걸어 망월동 묘지를 찾았습니다. 불어터진 발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장맛비가 억수로 내렸습니다.
마음 한 편으로 80년대 그 험난한 시절에 대학을 다녔고, 1987년 6월 항쟁까지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었던 대학생활까지도 자랑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역사란 진보하는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지요.
당신들의 뜻을 이어받아 30년 동안 노력했더라면, 벌써 평화통일의 기반도 거의 다 만들어 놓았을 것 같은데, 이 사회도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었을 것 같은데,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모두 좌파로 몰아붙이고, 빨갱이 딱지를 붙입니다. 여전히, 수구보수세력들이 득세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전두환을 구세주처럼 옹호했던 보수 언론들은 반성도하지 않고, 그 엄청난 기득권을 한 번도 잃은 적 없이, 지금도 여전히 광기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이젠, 젊은 세대에겐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동지였던 이들, 한때 동지였던 변절자들은 그런대로 한 세상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그동안 맞이했던 그 어느해 5월보다도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김민수/ 목사
* 한국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