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뒤덮인 도시, 왜 공동묘지처럼 보였나'
'십자가로 뒤덮인 도시, 왜 공동묘지처럼 보였나'
  • 송강호
  • 승인 2010.06.06 03: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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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더 이상 교회에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5년 동안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날 밤 나는 내부 순환 도로를 타고 연희동에서 구리까지 고가 도로를 달리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빨간 십자가들을 보았다. 교회의 십자가들이었다. 독일에 교회는 많지만 네온사인 십자가는 없기 때문에 그 광경이 매우 인상적이고 이색적인 풍경으로 내 눈에 비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독일에 유학 가기 전에는 무심코 지나쳐 왔던 이 광경이 불현듯 거대하고 어두운 공동묘지를 연상시켰다. 유럽의 공동묘지들은 비석 대신 십자가들이 서 있기 때문에 이런 많은 십자가는 공동묘지에서나 볼 수 있어서 밤하늘의 수많은 붉은 십자가들을 바라보며 네온 십자가로 뒤덮인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붉은 네온 십자가는 밤거리를 헤매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이른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기도처를 찾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이정표다. 그런 거룩한 이정표들로 뒤덮인 대도시 서울이 내게는 왜 무기력한 죽음의 공동묘지처럼 보였을까? 이렇게도 교회는 많은데 우리 사회는 왜 이다지 암울하고 추한 모습일까? 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교회가 많아지는데도 우리 사회는 부정과 부패로 썩어 가는 것일까? 왜 우리 교회는 한국 사회의 양심과 정직의 표상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거룩한 척하면서도 진실함이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당대의 신앙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했던 그 심정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똑같은 심정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책망을 듣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이웃 종교인들까지 합세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의 비난은 믿는 이가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핍박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그러진 삶과 신앙에 대한 정당한 질타다.

교세 확장은 파멸한 바벨탑의 길

비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기보다 개교회나 개교단의 교세를 확장하여 힘을 과시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강남의 사랑의교회는 2,000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헌금으로 새 예배당을 지으려고 한다. 이렇게 크고 값비싼 예배당을 지으려는 근본 이유와 동기가 무엇인가? 내가 불경스러운 마음을 가져서 그렇게 보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대규모 교회를 짓는 이들의 마음이 바벨탑을 쌓았던 이들과 그 동기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자신의 동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자, 성과 탑을 쌓아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모두 함께 모이게 하자." (창 11:4)

이런 마음이 세계 제일의 교회에 대한 욕심을 부채질하여 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국민들이 반대하는 데에도 아랑곳없이 내 교회를 내 돈 들여 내가 짓는데 무슨 참견이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교회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지 그 근본을 숙고해야 한다. 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자기의 영광을 구할 때 바벨탑과 같이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하나님은 '말을 뒤섞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바벨탑을 쌓는 일을 실패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자랑하고 탐욕스럽게 자기를 불리려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갈등과 분열로 파멸하게 하신다. 이것이 탐욕스런 대교회에 예정된 불행한 미래다.

나는 교회가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비판을 하면 무조건 의인을 향한 부당한 핍박이라고 자신을 정당화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종처럼 낮아져서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다. 우리는 너무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나머지 타인들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 가난한 타자들 가운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숨어 계신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타자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화해 대신 분열, 평화 대신 파당

스스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는 대교회들은 지금 지나치게 한눈을 팔고 있으며 길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우리 시대 한국 교회는 지금 심각한 시대의 도전 앞에 직면해 있다. 교회를 더욱 곤경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기독교인 대통령이 통치자가 되어 교회가 자신의 본연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국가에 끌려 다닌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교회가 로마 제국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며 하나님나라 현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 이후 교회가 제국과 야합 결탁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이명박 장로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명백히 반대하는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살리기로 새로 포장하여 방방곡곡을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다. 대도시에서는 재개발로 멀쩡한 집을 허물어 비싸고 화려한 고급 아파트들을 새로 세우고 시골에서는 산의 나무들을 삭벌하여 벌거숭이산을 만들고 있으며 뜻있는 농부들이 온갖 미생물들을 배양하여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한강 유역의 최고의 옥토들을 굴삭기로 뒤집어엎어 서울 사람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대통령의 옛 친구들이었던 건설 회사들이나 자기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횡재를 하고 자기 땅이 없는 가난한 세입자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분열하는 곳에서는 교회도 분열한다." 재개발 현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개발을 하면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빈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 왔던 연고로 친분과 유대를 맺던 주민들이 재개발로 갈등과 분열을 겪고 있다, 정들었던 이웃들 간의 관계가 돈의 유혹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교회들도 재개발 현장에서 좀 더 유리한 협상을 위한 고지를 얻어 노른자위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차지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재개발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 뿌리가 뽑힌 채 가난의 절벽으로 추락하는 가난한 교우들과 이웃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기 교회를 더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는 데 한눈을 팔지 말고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생존권을 빼앗긴 채 상처 입고 좌절당한 인간들을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이기적으로 자기 것을 챙기는 데에만 부심하지 말고 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개발 현장들 속에서 지역 사회를 이간질하고 파괴시키는 강력한 자본의 힘에 대항하여 연약하고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맞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화해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어야 하는데 실상 한국 교회는 평화를 만드는 능력이 거의 없다. 평소에는 외견상 화목해 보이던 교회들도 교인들 상호 간에 이권이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하루아침에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고 마치 원수인양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스스로도 내부적인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교회가 어떻게 지역 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화해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에 화해케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이 세상의 피스 메이커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 모두가 어려서부터 평화를 만드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 교회는 급변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지역 사회의 화해와 평화를 만들기는커녕 자기 공동체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분열과 파당 속에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분열과 갈등은 단지 재개발로 인한 것뿐 아니다. 정부는 전국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농부의 가슴살 같은 문전옥답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버리고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기름진 논밭을 사격장의 총알 밭으로 바꾸고 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는 논밭뿐 아니라 온갖 해양 생물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까지 메워 해군 기지를 만들고 있다.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 언론들은 한국이 대양 해군 시대를 열었다며 군부를 치켜세우고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에 더 강한 군사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동북아 지역의 군비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군 기지의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땅에 군인과 폭력이 존중받고 숭앙되는 군사 문화를 확산하는 것이고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을 적대 국가로 삼아 이들이 더욱 더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한 것 아닌가? 우리가 군사력으로 중국과 일본을 대항하고 또 이 이웃 나라들과 군비 경쟁을 하는 것이 지혜롭고 현실적인 판단인가?

그것은 우리의 군사력을 키워 미국이나 러시아를 대항하자는 것처럼 어리석은 선전 구호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과 전쟁 없이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미국 주도의 방위 전략에 엉거주춤 끼어들어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길을 가고 있다. 이처럼 어리석은 방위 전략이 어디 있는가?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을 원수로 삼아 왔다. 6·25를 전후해서 교회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겪은 고통과 박해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하거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겠다는 것이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런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로마 제국을 대했고 결국 그 원수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을 정복했다

한국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저버린 채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채 미국의 군사력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귀가 열려 예언자 이사야가 강대국 앗시리아의 군사적인 위협 하에서 애굽의 군사력을 믿고 의지하려는 위정자들에 대해 경고하면서 하나님이 친히 앗시리아와 싸울 것이니 야웨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 30~31장)

교회가 전쟁과 폭력에 시달려 온 우리 민족을 향해 예전 이사야와 미가가 예언했던 것처럼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고 가르쳐야 한다. 적어도 교회만큼은 전쟁을 반대하고 군인이 없는 세상을 꿈꾸도록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현실이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는 미래가 결정할 것이다.

흑인 노예들이 없이는 경제가 돌아갈 수 없었던 시절 노예 해방을 꿈꾸고 가르쳤던 퀘이커 교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전쟁과 군인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노래 불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의 신앙이었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으며 산상수훈을 지켜 온 초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맘몬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싸워 나가며 하나님의 형상의 존엄성을 지키고 지역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런 교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우리의 본분을 뒷전에 버려둔 채 수천억 원의 교회 건물을 짓는 데 정신이 팔리고 자기 교회 교인 수 불리기에만 급급해서야 되겠는가?

교회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경험을 교회에서 할 수 없다면 냉소나 자포자기에 빠질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런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가 되도록 모두 힘써 노력해야 한다.

도를 넘은 집단 이기주의

지금 교회는 자기 교회만을 생각하지 말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종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할 때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해 교회 자신도 손해와 희생을 감수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집단 이기주의는 그 도를 넘었고 이웃 교회에 대한 무관심과 서로 간의 무한 경쟁은 불신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종교에 대해 품고 있는 배타심과 독선적인 우월감에 대해 우리 이웃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따돌림당한 교회가 비로소 불신자들과 이웃 종교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불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햇빛을 내려 주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햇빛이 비추고 골고루 비가 내리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모두 하나같이 사랑하신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그런 분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분부하셨다. (마 5:48)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책무이고 과제다.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우리 자신에게 갇혀 있었고 우리 자신만을 생각해 왔다. 그랬기 때문에 수천억 원을 들여 개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눅 4:18~21)

이 가난한 사람들은 포로된 사람, 빚쟁이,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 환자, 농아인, 맹인,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이주 노동자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중에 갇힌 사람, 세리, 창기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마 11장 ; 25장) 그러나 오늘날 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 주는 '그들'을 잃어버린 채 누구를 위해 벌이는 잔치인지도 모르고 잔칫상의 음식을 자기 마음대로 휘젓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교회는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타자들이 교회의 주인이다. 그 타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돈 갖고도 내 마음대로 내 교회를 짓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군사 문화와 전쟁

우리나라는 급변하고 있고 그 변화는 교회에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군사 문화는 우리 시대 가장 강렬한 유혹이요 위협이다. 이런 강한 적과 더불어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여야 할 교회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안주하는 교인들의 숫자 불리기와 예배당 자리 넓히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교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나는 교회에 대해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지금 잠들어 있고 한눈을 팔다가 잠시 길을 잃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잠에서 깨어 일어날 수 있으며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가야만 할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고 다시금 그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좁은 문이 열려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청빈하고 평화로운 삶과 신앙의 산맥을 이어 온몸으로 평화의 복음을 증거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역사의 이정표들로 서 있는 한 우리는 이 평화의 길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송강호 /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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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2010-06-09 14:16:36
교회 속의 가라지들이 교회를 훼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Andy 2010-06-09 09:39:25
과연 그러합니다. 절대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