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영적 체험은 무엇인가?
진정한 영적 체험은 무엇인가?
  • 최태선
  • 승인 2019.04.19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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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영적 청정 대사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본래 먼지였으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쓰임 받은 것 아닌가"

오정현 목사가 C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미세먼지가 시급 현안이라면서 한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영적 청정대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교회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실천해오는 일이기도 하다.

오정현 목사가 C채널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뉴스M 자료사진)
오정현 목사가 C채널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뉴스M 자료사진)

나는 나 혼자 이동할 때는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산화탄소의 주범인 화석 연료의 사용을 가급적 줄이려는 것이다. 일회용 컵과 비닐 역시 사용을 줄이려 최대한 노력한다. 커피를 마실 때에는 머그컵에 달라고 말하고 외출할 때는 언제나 색을 메고 나간다. 장바구니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꼭 비닐에 담지 않아도 되는 상품은 그대로 색에 담는다. 나는 이런 실천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오정현 목사가 영적 청정 대사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했는가.

평소 그의 언행으로 보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영적이라는 말을 유난히도 많이 사용한다. 그 자신이 신령한 사람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무의식의 발현이리라. 그것은 커지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드러내는 언어습관이다. 그는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악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확실한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영적이라는 사실이 지배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한국교회에 휘몰아쳤던 기도원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된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지나쳤을 신앙의 함정이다. 기적과 능력이라는 ‘영적 함정’이다. 이 ‘영적 함정’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것으로 영적 성숙은 영원히 멈추게 된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그 함정을 지나야 비로소 시작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이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영적 체험을 했다는 그 자부심을 버려야 한다. 그 자부심을 버려야 진정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영적 체험이란 단지 함정에 불과하다. 믿음의 여정에는 자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부정과 자기부족이라는 깨달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자부심이야말로 영적 함정에 빠졌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함정'에 빠져 믿음의 여정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다.

칼 라너( 1904년 3월 - 1984년 3월)
칼 라너( 1904년 3월 - 1984년 3월)

칼 라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일상>이라는 책에서 진정한 영적 체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부당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고 참아 넘긴 적이 있는가.
*용서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에도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해준다는 말도 하지 않고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순명을 하도, 필요하니까 또는 불순명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라고 부르는 신비롭고 형언할 수 없는 실재 때문에 순명을 한 적이 있는가.
*남에게서 감사나 인정을 받거나 내적인 만족감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어떤 희생을 해본 일이 있는가. *완벽하게 혼자 있어본 일이 있는가.
*아무에게도 말하거나 해명할 수 없고 철저히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리고 이 결정이 그 누구도 개입하여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자신이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것일 때에 오직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결정을 내린 적이 있는가. 
*열정과 감정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 자신의 내적 충동과 하느님을 일체라고 느낄 수 없을 때에, 이 사랑이 죽음처럼 느껴지고 절대적인 극기로 여겨질 때에, 마음속에서는 깊은 허무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듯한 절규가 들려올 때에도 하느님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모든 것이 어릿광대짓으로 돌변할 것처럼 보일 때에 하느님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데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고 죽이는 쓰라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바보짓을 해야만 할 때에도 이 일을 완수 해본 일이 있는가.

 *아무런 고마움이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더욱이 우리가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만족감조차 느낄 수 없는 경우에도 어떤 선행을 해본 일이 있는가.

질문을 한 후에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영원을 맛보는 것이며, 영이 단순히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님을 느끼는 것이며, 인간의 의미가 단지 이 세상에서 말해지고 느껴지는 것만이 아님을 체험하는 것이라면서 손에 잡히는 근거 없이 신뢰를 감행하는 모험 속에서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장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느꼈던 우리의 인생의 그 순간보다도, 내가 성령을 경험했다고 감격했던 그 뜨거운 순간보다도 내가 홀로 있다고 느꼈을 때, 내가 아무런 대가도, 아무런 희망도 없는 순간을 불평하고 부르짖으면서 실낱같은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지그재그로 비틀비틀 거리며 걸어갔던 그 순간이 더 깊고 더 가까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던 순간이었음을… 그 순간이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의 순간이었음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칼 라너는 진정한 영적 삶이 일상의 삶의 변화임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한 모든 질문들을 하나, 하나 깊이 묵상해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오정현과 같은 이들이 말하는 영적 함정에 빠져 지배를 당하거나 신앙의 여정에서 표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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