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때문'이 맞았다.- 5.18, 헌법 전문에 넣어야
'전라도 때문'이 맞았다.- 5.18, 헌법 전문에 넣어야
  • 김기대
  • 승인 2019.05.18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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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서 신군부의 기획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 이 글은 김용장 허장환씨 기자회견 이후,  지난 2월에 쓴 '그들은 전라도였다'를 고쳐 쓴 것입니다

주한미군 정보요원 출신인 김용장씨와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은 지난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의 발포일인 1980년 5월21일 직전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또한 남한 특수군(편의대)이 가발을 쓰거나 거지처럼 분장하고 시위대로 침투하는 것을 확인했으며 이들은 방화나 장갑차 탈취, 유언비어 유포 등을 통해 시민들을 선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16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김대중 전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신군부(허장환씨는 반군부라고 표현했다)의 기획이 광주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왜 광주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목포는 너무 멀고, 대구 부산은 너무 크고 대전은 서울과 가까워 안보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가 기획을 펼치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5.18 진상 규명에 서광을 밝혔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있는 발언이었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자칫 광주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광주시민들의 항거라기 보다는 신군부의 기획에 말려든 운동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전라도는 오래 전부터 저항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신군부에 저항하는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으면 오늘날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보수정당은 민주화 운동의 열매가 행여 진보정당의 몫이 될까 염려하며 ‘대구 사태’를 그들의 과거 속에 찬란한 기억으로 묶어 두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1979년 부산 마산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이른바 부마항쟁인데 광주만큼의 유혈상태는 없었지만 박정희의 유신 선포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다. 그러나 지금껏 부마항쟁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느니 하는 말은 없다.

박정희 통치 시절 굴욕적 한일협정, 3선 개헌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대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인을 동원해 시민 세력을 통제해 왔었다. 당시의 시위는 서울의 대학들이 중심이었다. 1975년 인혁당 사태로 대구 경북의 향토 진보 세력들은 궤멸했고 부산 경남 지역은 제도권 안에 있던 김영삼이 정치 제도권 안에서 반유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3.15부정선거 반대 시위에서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주열군이 목숨을 잃으면서 마산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이 한 번의 사건으로 부산이나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야 박정희 정권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세간에서 회자되었었다. 이 말은 개혁세력 내에서 조차 호남은 안중에 없었다는 뜻이다. 김주열은 호남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신 시절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결국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의 민주당 세력,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 등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의 엘리트 세력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는 재야에서 제도권 정당으로 편입할 때 당시 신한국당을 택했다. 김대중의 정치 참여 번복이 싫다며 우익정당을 택한 그들의 속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 점에서 이전의 모든 운동의 공식을 뒤집는 사건이었다. 운동 엘리트들이 신군부의 권세에 눌러 모두 잠수를 타거나 잡혀가고, 유시민 심재철 등 당시의 학생운동 지도부가 청와대 회군론을 외친 그 지점에서 그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드라마에서 항상 식모, 구두닦이, 빈민 역할을 도맡아 하던 전라도에 대한 혐오의 대상들이, 즉 실제 그 계급에 있던 사람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것은 광주 이전의 운동들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특별히 지도부라고 부를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민중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세계 민중운동에 대한 연구자로 유명한 조지 카치아피카스(보스턴 웬트워스 공대 교수)의 “광주는 20세기의 파리코뮌이며, 민중의 저항과 자치 역량에서 세계사적 정점” 에 있는 사건이라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권력 피라미드 중에 가장 하위에 있었던 전라도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이처럼 중요한 획을 그었던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어서는 안되고 북한의 난동이 개입한 자리여야만 한다.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반역이어야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망언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세월호 보상금처럼 ‘돈’의 문제를 부각시켜 사회 소외 계층을 자극해 망언의 앞잡이가 되게 한다. 지만원도 대령으로 제대한 그의 전력이 보여 주듯이 망언운동의 실제 배후 세력은 아니고 연대장 급이다. 그 뒤에는 강고한 호남 배척 세력들이 있다. 전라도는 ‘유공자’이기는 커녕 늘 비주류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언어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라도 출신일수록 서울말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경상도 출신일수록 경상도 사투리를 잘 고치지 않는다. 고향을 내세우는 사람(영남)이 있는가하면 숨기지는 않더라고 굳이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호남)도 있다.

한겨레 신문 기자 출신의 정남구가 쓴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를 보면 전라도는 가진 것이 많아서 빼앗긴 것도 많았던 지역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의병을 조직해 타 지역에 의병을 보내기도 했다. 1980년 이후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후천개벽을 꿈꾸던 동학혁명이 그곳에서 있었고 증산교의 강일순과 원불교의 박중빈이 전라도 출신이다. 정남구의 말처럼 전라도는 혁명과 개벽의 땅이었던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 에너지가 다시 분출된 사건이다.

호남은 배척과 혐오의 땅이 아니라 다른 지역이 빚지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김, 허 두 사람의 증언은 고맙지만 그 증언으로 인해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신군부의 기획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축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허장환씨는 뉴스공장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을 김대중씨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께서’라는 말로 존경을 표했다. 김어준사회자가 계속 ‘김대중 총재’라고 호칭해도 김대중씨로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듣는 이들에 따라 불편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호칭이야 말로 광주민주화 운동을 규정하는데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허씨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의중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광주’와 ‘김대중’, 즉 장소와 인물을 중심에 두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과 인물을 뛰어 넘어 전라도의 개벽 정신이 5.18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즉 '김대중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조차 5.18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허장환씨는 방송 말미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헌법 정신에 넣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맞는 말이다. 헌법 전문에 5.18이 자리잡을 때 비로소 ‘전라도’는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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