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보낸 지 10년, 다시 짖는 '그'들
노무현 보낸 지 10년, 다시 짖는 '그'들
  • 김기대
  • 승인 2019.05.22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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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그날은 금요일(한국시간으로 토요일)이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 또 모처럼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 책을 읽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80 노모의 전화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항상 불안하다. 그런데 노모의 목소리가 활기차다. “야! 노무현 죽었다!”  슬펐다. 서슬퍼런 유신시절 박정희가 나쁜 사람이란 걸 알려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한국 전쟁 당시 피난을 안가고 서울에 남았지만 공산군은 그리 포악하지 않았었다고,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하자 두려운 얼굴로 퇴각하던 북한 소년병들을 잠시 쉬었다 가라고 집에 숨겨주었었다고, 학교에서 배운 ‘반공’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던 엄마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노모의 목소리가 활기찬 이 현상은 무엇인가?

영남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부모는 열렬한 김영삼 지지자였다. 그러나 3당 합당과 함께 그들의 정치 성향은 김영삼을 따라 갔다. 외국에 나가 있는 막내아들이 공부시켜 놓았더니 고졸 출신을 따라다니는 노사모 따위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노무현의 죽음이 슬픈게 아니라 노모의 활기찬 음성이 나를 슬프게 했다.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확인하는데 전화기가 연이어 울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추모공간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냐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앞에 나서는 것도 지쳤고 그렇게 떠나버린 노무현도 야속했고 그를 대역죄인 취급하는 가족과 사회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교인들의 눈초리도 부담이었다.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전화도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늘 그렇게 앞장 세워 놓고는 일이 생기면 비겁하게 숨고, 일이 안생기면 자신들이 다했다고 공치사를 하던 모습을 많이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노숙자 급식이 있는 날이었다. 새벽 5시부터 교회에 모여 식사를 준비하고 거리에 나가 이웃을 대접하고 교회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어제 전화한 ‘원로’ 몇 사람이 교회로 직접 찾아와서 추모 공간을 꾸려야 한다고 나를 채근했다. 함께 있던 교우들을 둘러보니 해보자는 표정이었다. 그래 마지막이다. 이번을 끝으로 나도 ‘정계은퇴(?)’다. 6월부터는 동거를 3년 정도 해보고 교회를 합치자는 같은 교단 미국 교회 목사의 제안에 따라 예배 처소를 옮겨 나도 ‘목좋은 곳’에서 ‘사기’(목사를 풀어쓴 자조적인 말)를 쳐 볼 계획도 있던 차라 진짜 마지막 대중 활동이라는 마음으로 장례위원장을 수락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한장면
영화 '노무현입니다' 한장면

노동상담소를 추모장소로 빌리고, 교회 있는 비품들을 동원하고, 아내는 검은 천을 비롯해 제기(祭器)를 사러 뛰어 다니고, 컴퓨터 잘하는 김집사는 동영상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에 미국 교회들 처럼 역대 목회자 초상화를 걸어 놓았었는데 한국 교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지 떼라고 해서 보관해 놓은 액자가 있었다. 그 액자 중 한 분에게 미안하지만 그 액자에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대신 집어 넣었다. 교회 아동부실을 둘러보니 아이들 그림 교육용으로 백지 두루마리 뭉치가 큰 게 보였다. 나중에 채워놓을 요량으로 가져와 노동상담소 1층 입구부터 계단을 따라 분향소까지 벽에 붙였다. 추모객들이 거기다가 여러가지 감동적인 추모사들을 남겨 두었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 나중에 남은 부분이라도 교회 반납하려고 찾아보니 이미 누군가 슬쩍했고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의 노무현 재단(아마 그 때는 이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다)에 ‘자신들이 기획하고 준비 다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에 의해 기증되어 있었다.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오전 8시에 시작한 분향소 준비가 2시간 만에 어설프게라도 꾸려졌지만 로스앤젤레스 분위기에서 올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마음에 불안했다. 미시유에스에이에 소식을 알리니 놀랍게도 11시 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녁에 한인타운 중국식당 ‘용궁’에 각 시민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여기서 장례위원장으로 나와 박상준씨 (현재 피코 유니온 주민회의 의원)가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추인됐다. 실제로 일을 맡아할 사무총장을 선임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해진 일잘하는 우리 교회 전도사는 하필 그날부터 다른 일이 생겨 사무 총장을 맡을 수가 없었다.

대신 지명한 친구가 문제였다. 몰려오는 추모객을 보고 자기 ‘정치’를 해보자고 그 와중에 새로운 단체를 하나 조직하고 장례위원회에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메일리스트와 방명록을 독점하고, 재정보고도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싸우는게 추하다고 생각되어 참았던 내 자신을 지금 돌아보면 후회된다. 당시 그의 행동을 비판하던 이들이 지금도 똑같이 파열음을 내며 그가 하던 분열책동을 따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는 순환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일요일에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다녀갔고 월요일은 휴일인지라 직장에 나가지 않은 아내가 훌쩍 거리며 분향소를 지켰다. 연인원 3000명은 다녀간듯하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의 기적이었다.

우리교회가 6월부터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목좋은‘ 임마누엘 장로교회에 우리 교회 행사라며 양해를 구해 29일에 한국과 시간을 맞추어 추모제를 했다. 6월 첫째 일요일부터 새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를 옮기는게 불만이었던 일부 교인들이 노무현 추모제를 빌미로 교회를 떠났다. ‘신실한’ 목회를 새롭게 해보자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빈자리를 이런 진보적인 교회가 있는줄 몰랐다는 새로운 교인들이 채웠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계획도 새로운 이들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노무현 보낸지 10년, 그날의 기억을 남겨둘 필요가 있을것 같아 되새김질 해봤다.

10년이 지난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할 때는 숨죽여 있던 '그'들이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지자 다시 짖기 시작했다. 수치를 왜곡한 경제 위기 프레임, 사법부 독립, 검찰권 훼손등의 용어로 자기들의 집단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다. 보수언론을 등에 업은 자유한국당의 입에서는 독재타도, 5.18 북한 개입설, 김정은 대변인 같은 망언들이 아무 부끄럼 없이 내뱉어 진다. 청와대를 폭파시키겠다고 해도 서울중앙지검장을 죽이겠다고 해도 거리를 활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회가 안타깝다. 장자연 사건과 버닝썬 사건은 슬쩍 덮여졌다.

루쉰은 1926년에 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서 물에 빠진 개는 무조건 치라고 말한다. 나를 해치려고 했던 개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 동정심을 가지고 구해주기 보다는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몽둥이로 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전갈을 구해준 사막의 수행자와 비교된다. 수행자가 위험에 처한 전갈을 구해주자 제자가 그러다가 물려 스승님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때 수행자는 무는 것은 전갈의 몫이고 구해주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대답했다. 감동적인 말이지만 정치인이 수행자는 아니다.

개혁을 위해 쳐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쳐내야 한다. 우리는 노무현을 너무 좋아했다. 그의 인격과 살아온 삶의 자세로 인해 세상이 그냥 좋아 질 것이라 믿을 만큼 순진했다. 그러나 노무현과 우리를 물어뜯는 ‘그’들을 인격체로 보았던 것이 실책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국회선진화법에 걸려든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인권 침해 요소가 많아서 필리버스터를 통해 막으려고 했던 테러 방지법도 결국은 통과되었다. 이왕 통과된 법, 청와대를 폭파하자는 ‘그’에게 이 법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UN에서 조차 반인권적이라고 폐지를 권고한 국가 보안법도 못 없앨 바에야 전쟁을 부채질해 국가 위기를 조장한 ‘그’들에게 적용해야 한다.

페어 플레이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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