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필요 없다!'
'목사는 필요 없다!'
  • 김영봉
  • 승인 2019.08.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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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영봉 목사가 제11회 미국 워싱턴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일상과 성소'를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 편집자 주 -

오늘은 이 컨퍼런스의 전체 주제, ‘일상의 삶과 목회’와 관련된 주제인 ‘일상과 성소’에 관해 얘기하려고 한다. 이 시간에는 특히 세계관에 관해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기독교인들은 주로 성소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소를 어떻게 일상과 연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 강연의 주제이다.

세계관에 관한 세 가지 패러다임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 가지 패러다임이 존재했다. 첫째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식민(Colony of Heavenly Kingdom)로 보는 관점이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교회는 그 식민지의 거류민 집단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로열티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이 세상을 어떻게든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과제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따른 세계관이다.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구분한다. 이 세계관에서 땅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 패러다임에 속해 있는 동안 자주 부르짖은 캐치프레이즈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세우는 것을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과제로 여긴다. 전 인류의 복음화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내가 자란 전통 교회에서는 이 패러다임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둘째, 장망성(City of Destruction) 패러다임이다. 장망성은 장차 망할 성이라는 뜻이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번역할 때 영어 ‘City of Destruction’이라는 구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 세상은 장차 망하여 폐기될 성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목표는 속히 장망성을 탈출하는 것이며 천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은 오직 전도뿐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은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네’라는 찬송이 이 패러다임을 잘 드러내준다. 흑인 영가 가사의 상당 부분이 이 패러다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를 속히 이 세상에서 데려가 주십시오’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 우리 찬송가에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곡들이 이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죽어갈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을 갖게 되면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환경 문제 혹은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고,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환경 보호에 관한 설교를 하면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연이 오염돼서 이 세상이 빨리 망하면 그만큼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것인데 왜 환경 보호를 얘기하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 베델(House of God)의 패러다임이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고 하나님 나라는 세상 안에 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톰 라이트가 얘기한 대로 서로 interlocking 되어 있다.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눈을 뜨면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지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라 차원(Dimension)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3차원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차원(Absolute Dimension)은 그보다 훨씬 높고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물리학에서는 11차원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바울이 삼층천까지 갔었다고 하는 영적 체험이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차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으로 살면 신앙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눈뜨고 그 나라를 사는 것이 지향점이 된다. 강영안 교수께서 이번 컨퍼런스에서 여러 번 언급한 요한복음 17장에 나온 말씀과 같다. 즉,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결국 변모될 것이라고 믿는다.

톰 라이트가 [Surprise by Hope]라고 하는 종말론에 관한 책에서 계속 강조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재림은 저 먼 세상 어느 곳에서 이 세상으로 뚫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비현실로 보이는 것이 현실이 되고 우리가 현실로 보는 이것이 바로 비현실이 되는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이 재림이다.

내가 신학을 공부할 때, 이 재림이라는 개념을 참 어렵게 느꼈는데 톰 라이트를 통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 나라를 차원으로 이해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해한 다음부터는 재림, 새 하늘, 새 땅, 부활 등이 더 잘 이해되었다.

베델의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보기
나는 위 세 가지 패러다임 중 베델의 관점이 가장 성서적이라고 믿는다. 베델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면 이분법적, 흑백 논리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거룩성과 세속성의 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어느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지음 받은 존재는 거룩성과 세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세속성은 가시적이고, 거룩성은 불가시적이다. 이것이 함정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뿐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본다면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속성과 보이지 않는 거룩성을 함께 보고 그것을 균형 있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성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거룩성을 보고 그것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 보면 실망하게 되고 ‘과연 이게 교회인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어떤 교회이든 그 안에 거룩한 차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에 지리멸렬한, 그런 가시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 안에 영원하고 거룩한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고 목회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 현장에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 절망감과 좌절감과 환멸감을 주는 그런 정말 상처투성이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나의 사랑의 한계를 거듭거듭 시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도 여전히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베델의 패러다임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성서학도로서 내가 믿는 것은 ‘베델로서의 세계관’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예수님의 영성과 바울의 영성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성 생활의 과제는 성소와 일상 사이에서 춤을 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생활의 과제는 일상생활에 파묻혀 살면서 우리 눈에 낀 비늘을 성소에서 벗겨내는 것이다. 시편 73:17에 나온 것처럼 성소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눈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시 볼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한심해 보였던 교회가 거룩해 보이고, 한심해 보였던 사람들이 거룩해 보이고, 내가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지겨운 일들이 거룩해 보이는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성소를 살고 성소를 일상화하는 그런 변화가 우리의 영적 생활을 통해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다.

이제 베델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볼 때 성전과 제사장과 성일의 개념은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자.

성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장소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시온산이냐, 그리심산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소위 정통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성전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건물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보면) 바로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몸은 그분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안에 세우리라’ 했을 때 그것은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성전이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교회로 모였을 때가 성전이다. 성도의 몸도 성전이다. 이 세 가지를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은 없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를 위한 처소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이라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모여 있지 않을 땐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그냥 건물이다. 아무리 허름한 곳이라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거기가 성전이 된다. 건물이 없다 해도, 우리가 야외에 가서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성전이다.

성전이 없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오히려 온 천하가 다 성전이라는 말과 같다. 영과 진리로 살아가는 그리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천하가 다 성전이다. ‘영과 진리로,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중요하다.

또한 만인제사장 직에 의하면 모든 직업이 다 성직이고 모든 일터가 다 성전이다. 일터는 성전이고 자신은 제사장이며 동료는 교인이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가 다 제사장이다. 그런 사람이 섬기는 일은 모두 예배다.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내 목회의 목적은 목사가 필요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목사가 필요 없는 교인들이 되어야 비로소 동역자로서 교회의 역할을 한다. 목회자가 교인들 치다꺼리 하느라고 밖에 나갈 겨를이 없는 목회 현장이 얼마나 많은가!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때 비로소 목사와 교인이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목사와 교인이 동역자가 되어야 세상을 위한 일을 함께 할 수 있다.

강영안 교수님 말처럼 목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런 사람이 섬기는 일은 모두 예배다. 이런 방식으로 성전과 제사와 예배에 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제사장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 2:9에서는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라고 얘기한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거룩성을 회복한 사람들이다. 성도라는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성인(saint)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를 섬기는 직책을 나열할 때 감독, 장로, 집사 등의 말을 사용하면서 제사장이라는 단어는 넣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뺐다고 보는 것이 옳다. 초대교회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직함이었지만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2세기에 이르러 고대 교회에서 다시 구약적인 시스템을 차용해서 사제제도를 만들었고 이 개념이 현재 가톨릭의 사제 제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성인은 없다.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성인이다. 제사장은 없다. 모두가 다 제사장이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 이 이야기를 하면 목사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는 종이다.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다. 목회직만이 성직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성직이다(고전 10:31; 골 3:22-25). 우리가 가끔 보듯이 목사로 살면서 세속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더 타락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선교지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곤 한다. 선교사로 혹은 목사로 살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목회직 혹은 선교사직에 있으면서 거룩성을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속 직업을 통해서도 거룩성을 지켜야 한다. 사실 그것이 더 어렵다. 세속 직업인으로 살면서 제사장처럼 사는 것은 참 어렵다.

성일(Holy Day)은 어떤 날을 말하는가? 구약에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이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현재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자고 신문에 광고를 내는 사람이 있다. 신약에서는 모든 날이 거룩하다(Everyday is holiday!). 존 웨슬리가 한 말이다. 'holyday'는 휴일이 아니라 성일을 의미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성일은 없다. 매일이 성일이다.

결국 신약에 와서 거룩의 개념이 바뀌었다. 구약에서의 거룩은 구별됨 즉 위치의 변화였다. 그 구별됨은 제의적인 가이드라인만 지키면 된다고 인정되었다. 신약에 와서의 거룩은 ‘변화됨’을 의미한다. 즉, 변화를 통해 구별된다. 제의적인 율법을 통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별된 삶을 삶으로써 거룩하게 된다. 신약에서는 모든 날이 거룩하다. 날의 구별보다는 존재의 변화(transformation of being)가 더 중요하다. 믿음을 통해 거룩하다고 인정받는 칭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성화, 온 우주적인 변화 안에서 그 변화가 완성되는 영화가 일어나는 것이 거룩이다.

거룩함이란 또한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함은 이 땅에서 완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주어졌고 강화해나갈 수는 있다. 완벽한 거룩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그 거룩의 빛을 더 강화시킬 수는 있다. 우리의 영적인 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주어진 그 거룩함을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과 영적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가야 한다.

왜 우리는 거룩함을 완성할 수 없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이 거룩성에도 작용한다. 이미 와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변증법적인 성격이 거룩성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면에서 거룩함을 보고 그것을 키워가는 것이 우리의 부름이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소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성소 파괴가 답인가?’라고 묻는 이가 있다. 하지만 일상을 성소로 만들기 위해 성소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고 깊어야 한다. 일상을 성소로 만든다는 말이 ‘나는 성소가 필요 없다’는 핑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하루 종일 기도의 삶을 산다’는 말이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오해를 일으켜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하루 종일 기도의 삶을 살아가려면 충분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직업을 성직으로 섬기기 위해서 예배를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려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더 강렬해야 하고 더 충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성인으로 대하기 위해 먼저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성인으로 만나야 한다. 매일을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주일을 더욱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베델 패러다임은 성소를 파괴하자는 말이 아니고 성소를 더욱 세우자는 말이다.

‘우리가 이 성소 안에 갇히지 말자’ 혹은 ‘성소를 벗어나서 모든 세상을 성소로 알고 살자’ 하는 말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이 성소를 훼파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성소로 살아갈 수 있는 영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성소를 더 지켜야 한다. 일주일 내내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룩한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성소를 더 구별되게 하고 더 충만하게 하고 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이 해법이다.

참고: 베델 패러다임에 관한 말씀들

  • (구약) 창세기 28:10-17; 출 3:1-5; 출 33:17-23; 시 8편 139편; 시편 73:17; 사 6:1-8
  • (신약) 마 10:40-42; 마 12:22-32; 마 13:44-50; 마 17:1-8; 요 4:23-2; 요 14:8-14; 로 12:1-2; 고전 3:16-17; 고전 6:19; 고후 5:1-10; 고후 5:16-17; 엡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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