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일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 강영안 교수
  • 승인 2019.08.10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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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일상의 삶과 목회’ 두 번째

 

다음은 칼빈신학교 강영안 교수가 제11회 미국 워싱턴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일상의 삶과 목회’를 주제로 한 강연 중 두 번째 시간을 정리한 글이다. 강영안 교수는 총 3회의 강연을 했다. -편집자 주-

19세기 말 아돌프 하르낙은 초기부터 기독교는 헬라화되었다고 진단했다. 이 진단과 함께 서양 신학계는 탈헬라화와 유대화 과정을 밟는다. 역사적 예수 탐구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조직신학의 중요한 물꼬를 튼 칼 바르트의 신학에도 기독교의 헬라화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어 있다. 플라톤적 사고에는 일상과 비일상, 영원과 시간, 이 세상과 내세를 구분하는 이원론이 있다. 히브리적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보지 않는다. 이를 염두에 두고 내가 철학하는 방식을 얘기해보겠다.

철학하는 방식

나의 철학은 항상 어떤 주제를 다룰 때 세 단계를 거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현상을 자세하게 그려보고, 둘째, 그 의미를 묻고, 셋째,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플라톤, 칸트, 헤겔 등의 철학을 접해봤을 것이다. 이들 철학자들에 관해 공부하는 것은 ‘철학’이라기보다 ‘철학의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는 그들이 남긴 철학 저서를 통해 알게 된다. 역사는 철학함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철학함’과 ‘철학의 역사’는 구분된다.

철학은 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보자. 철학은 머리로 하는 것이다.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각만 하면 공상에 빠지게 된다. 공상에 빠지지 않고 철학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코넬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했던 말콤(Norman Malcolm)은 케임브리지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배운 제자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콤을 찾아 미국에 온 적이 있었다. 말콤이 케임브리지에 머물 때 비트겐슈타인이 그에게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방에 갇혀 있었다. 방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궁리를 했다. 벽난로의 굴뚝을 통해서 나가려고 해도 너무 좁아서 나갈 수 없고, 창문을 통해 나가려고 해도 너무 높아서 나갈 수가 없었다. 고개만 뒤로 돌아봤더라면! 문은 늘 열려 있었는데!”

제대로 보지도 않고 생각에만 갇혀 있는 사람을 두고 한 이야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마라. 보아라(Don't think, but look)"라고 했다. 내가 철학하는 방식도 우선 골똘히, 자세하게, 뒤집어보고, 돌아보는 방식이다.

여기 탁자가 있다. 여러분에게는 뭐가 보이는가? 내게는 지금 탁자 위만 보인다. 옆에서 보면 옆면만 보인다. 앞에 있으면 앞면만 본다. 우리는 탁자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탁자 전체를 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 있거나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보이는 부분만 본다. 탁자 뒤의 배경이 되는 지평은 보지 못한다. 탁자를 제대로 보려면 돌려서 사방을 보고 뒤집어 밑을 보고 빠짐없이 모든 부분을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고 그것을 보이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본다’는 의미를 마음에 두고 일상을 함께 그려보자. 일상에는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드러나는가? 여러분의 일상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아침에 일어난 때부터 한번 돌아보자. 일상은 자고 깨고 먹고 등등 수많은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이라는 일상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다. 지평을 점점 넓혀가다보면 일상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일상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지평을 넓혀 생각해보면 태어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상은 시간적 지평 안에 주어져 있으며 이 지평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 삶 이후의 시간에도 이런 일상이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일상의 필수 요소들

먹고 마시고 잠자고 공부하는 우리의 일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우리에게 물리적 공간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들이다. 이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space)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체험된 공간, 곧 일정한 하나의 장소(place)이다.

네덜란드 출신 몬드리안(Piet Mondriaan)이라는 화가가 있다.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나는 1978년에 벨기에로 유학을 떠났었는데 그해 겨울 나중에 지도교수가 된 반 퍼슨 교수를 찾아갔다. 헤이그에 살고 계셨는데 첫 방문 때 헤이그 시립 미술관을 찾아갔다. 그 미술관에는 몬드리안이 젊었을 때 그린 그림이 많이 있었다. 몬드리안은 초기에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그러다 1910년을 전후로 그의 작품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후로 주로 기하학적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는 방도 기하학적 공간으로 배치하였다.

반 퍼슨 교수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쪽 풍경화는 현상학적이고 저쪽 구성화는 분석철학적이다.” 현상학은 삶의 체험을 드러내고자 하고 분석철학은 개념을 분석하고 언어의 논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공간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손때가 묻고 땀이 묻고 우리의 기억이 있는 채색된 체험된 공간이다. 우리는 체험된 공간, 곧 주어진 일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일상은 수많은 행위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고 사람들 만나는 행위들이 있고 이 행위를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어 나간다. 물론 이 가운데는 빈 공간이 있고 빈 시간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일상은 주어진 공간과 시간을 떠날 수 없다.

누구의 일상인가?

그렇다면 이 일상은 누구의 일상인가? 나 자신의 일상이다. 남의 삶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에게 음식과 음료수를 제공할 수는 있다. 잠자리를 남에게 내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먹고 마시는 일을 타인을 위해서 대신 해줄 수 있는가? 남을 위해서 대신 해서 잘 수 있을까? 깨어서 하는 어떤 행위는 대신 할 수 있다. 하지만 졸린 사람을 위해서 대신 잘 수 없고, 배고픈 사람을 위해서 대신 먹을 수 없고, 목마를 사람을 위해서 대신 마실 수는 없다.

우리 삶은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마셔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삶이 나를 위한 삶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신앙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 삶은 사실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를 지으시고 회복케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먼저가 된다. 두 번째가 이웃이 된다.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일상의 삶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서 볼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기를 추구하는 삶이다. 나의 삶을 살되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사는 삶이다.

일상의 조건들

그렇다면 이런 일상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물어보자. 그리고 일상의 삶의 특징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의 공통된 조건은 무엇인지도 질문해보자.

일상 속에서 인간의 조건 중 하나는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먹고 자고 마시는 것을 아무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각각 자신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약 20여 년 전에 연세대 간호대학 대학원생들과 교수들 대상으로 고통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느 교수가 강남 세브란스 어린이 암 병동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새벽 1-2시경에 어느 한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소동을 벌였다. 간호사들이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아이의 암을 내게 옮겨서 내가 죽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왜 안 되느냐’고 했다.

우리는 신체로 나와 타인이 분리되어 있다. 내가 몸이면 타인도 몸이다. 우리는 모두 몸을 통해서 고통과 쾌락을 경험한다. 내 손에 찔린 가시 하나의 고통이 암으로 인한 타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인간은 신체적이다. 동시에 우리 각자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영적인 차원을 누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라고 보고 이제 그 특징을 살펴보자.

일상의 특징

이것은 일상의 해석학과 관계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먹고 자고 마시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이다. 이 일상을 떠나 도피를 한다고 해도, 어디로 가든지 거기에는 다시 그곳에서의 일상이 어김없이 찾아오게 된다. 멀리 관광을 간다고 해도 그곳에서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자야만 한다. 법정 스님은 [인도 기행]이라는 책에서,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도에서 깨달았다고 썼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일상은 필연적이다. 일상의 필연성이다. 어떤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자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이런 필연을 일시적이나마 무효화할 수 있다. 일상을 우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상은 사람마다 각각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일상은 차이가 있다. 종교적 행위와 구제 활동 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노숙자처럼 자든 좋은 집에서 자든 모두가 ‘잠’을 잔다. 이 잠은 공통적이다. 이것은 일상의 유사성이다.

세 번째, 일상은 계속 반복된다. 어제 잤다고 오늘 자지 않아도 되고, 어제 먹었다고 해서 오늘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어제 했다 해도 오늘 또 해야 된다. 일상의 반복성이다. 그리고 우리의 반복된 일상은 습관이 된다. 습관과 학습을 통해서 우리 일상의 삶은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은 권태를 낳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반복 중에도 학습하고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일상이다.

‘새 날’,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등 새로운 것에 대한 강조가 성경이 다른 경전과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교나 힌두교 등 다른 종교의 경전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이런 강조가 별로 없다. 니체의 말처럼 ‘동일한 것에의 영원한 회귀’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한 날 한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날들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하신 날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하면서 이 날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일상은 영어로 평범한(ordinary) 날이라는 의미가 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다. 하지만 ordinary 안에 질서(order)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일상은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고 정제되고 서로 관계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방과 방 공간과 공간이 연결되어서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 안에 일정한 질서가 주어져 있다. 이것들이 일상을 이루는 조건들이다.

물론 이 평범한 일상 중에서 예기치 않은 일, 특별한 일(extraordinary)들이 일어나기는 한다. 어두운 일 기쁜 일 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서 보면 결국에는 다 덧없이 흘러가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두어주시고 보존해주시고 다시 새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없다면 인생은 그저 허무하게 끝나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켜주시고 기억해주시고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도서에 나온 구절처럼 모든 것이 헛되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인가? 전도서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무가치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 눈에 보잘것없고 무가치하게 보이더라도 우리의 일상에 관계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어떻게 살 것인가?

일상의 현상학과 해석학을 거쳐서 넘어갈 수 있는 세 번째 단계는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일상의 윤리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상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이 선물을 잘 보관하고 지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잘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써야 한다. 일상은 우리에게 선물(gift)로 주신 것이다. 선물은 잘 사용해야 하는 과제(task)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 어떻게 잘 사용할까?

첫째, 무슨 일을 하든지 순간순간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담아서 하자(Be mindful). 무엇을 하든지 깨어 근신하는 마음을 갖자. 먹고 마시고 자는 것도 귀한 일이다.

예전에는 예배와 같은 종교적 일들이 거룩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반대로 일상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속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상의 거룩함을 일깨운 것이 바로 교회 개혁 운동이다. 칼빈, 루터, 존 녹스, 존 웨슬리 등 개혁자들이 일깨워 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이 모든 것들을 인해서 감사하자(Be thankful). 일상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공히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일을 비롯해서 우리 육신의 삶과 정신 등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신자와 불신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알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이 차이가 난다.

셋째, 기뻐하자(Be joyful). 비록 고통을 겪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 모든 만물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평화 즉,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우리 자신과 이웃, 나와 내 내면의 관계 등 이 모든 것들이 회복되고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기쁨은 나 혼자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성도와 목회자가 함께, 온 교회가 함께, 온 우주 만물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말한다.

넷째, 기도하자(Be prayerful).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알고 감사할 때 기도할 수 있다. 기도 가운데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이 일상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 목회도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목회와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삶이 복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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