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전 재산을 원하셨나?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전 재산을 원하셨나?
  • 강태우 기자
  • 승인 2019.08.12 22:3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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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7월 28일 사랑의교회 강남예배당 632회 주일마당기도회에서 한국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가 누가복음 20:45-21:6 절을 본문으로 "두 렙돈, 과부의 헌신과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내용으로 이해한다. 도대체 얼마나 신앙이 좋으면 대책도 없이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 있을까? 물론 액수로 보면 그녀가 바친 두 렙돈은 지금의 1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것은 그녀에겐 생명과 같은 전부였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음에 껄끄러운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정말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과부에게도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인가?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 과부의 헌금을 생각하다 보면 마지막 남은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죽음을 준비하던 궁핍한 사렙다 과부에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엘리야가 생각난다(눅 4:25-6; 왕상 17:8~15). 정말 철면피 같은 선지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과부의 마지막 것을 빼앗는 듯한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알기에 엘리야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보시고 엘리야를 통해 밀가루와 기름을 차고 넘치게 공급하셨다.

그렇다면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도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오래 살았을까?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본문을 보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모범적인 헌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혹시 다른 깊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경우에도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은 본문의 문맥과 저자의 전반적인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문맥을 보자. 이 내용을 누가복음 21:1~4절이 아니라 20:45-21:6절로 볼 때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원래 성경에는 장, 절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찬찬히 본문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20:45-21:6)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와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한 내용으로 변한다.

강도의 소굴에 재산 바친 과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다(막 11:17; 마 21:13; 눅 17:46). 그것은 성전 안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긴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그리고 성전 청결을 통해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셨다(눅 19:46; 마 21:12-13; 막 11:15-18; 요 2:13-16). 그렇다면 이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헌신적으로 전 재산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졌다.

당시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친 그녀는 생명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도 전부를 바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성전에 헌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생활비를 다 바쳐서라도 신명기적인 하나님의 물질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외친 종교 지도자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종교적 착취는 경제적 압제보다 단수가 더 높다. 종교 권력은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 강탈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돈뿐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과부는 쉽게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 물든 종교적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과부는 더 가난해지고 종교 지도자는 더 부유해진다.

문제는 성전 당국자들과 율법 지도자들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만을 전했던 엘리야와 달리 탐욕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를 착취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알려진 것으로는 과부가 바친 "한 줌의 고운 가루"를 작은 예물이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제사장의 이야기(Lev. Rab 3.5 [레 1:17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과부들을 강탈하는 예루살렘 제사장 단을 비난하고 과부들이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매춘을 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이야기(4Q270 5, 19)가 있었다.

또한, 구약 선지자들의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비판과 심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렘 7:6).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 결핍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호를 명한다. 누구도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출 22:22). 신명기 언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공의를 베푸시는(신 10:18)" 분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소외된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신 24:17; 27:19).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다(신 14:29; 26:12-13).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사 10:2).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받들어 과부의 가산을 탐하는 것을 비난하였고(막 12:40), 참된 경건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했다(약 1:27).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눅 21:3~4) 과부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착취당하는 과부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성전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탐욕을 경고하고 종교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잘 들어맞는다. 탐욕스러운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요, 가난한 자의 헌물로 사치스럽게 꾸민 성전은 사실 그들의 '소굴'이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과부의 이야기이다.

당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과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이 무너지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이다.

성공하고 복 받으려면 헌금 많이 해야?’

오늘날 만일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인 극빈한 과부가 끼니를 때울 마지막 남은 몇 천 원의 생활비를 교회 헌금함에 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는 혹시 일부 탐욕적인 부흥사의 기복적인 설교로 말미암은 희생자는 아닐까?

그녀가 어떤 동기로 헌금하였는지 물론 중요할 것이다. 만일 어려운 중에서도 풍성하고 즐겁고 아낌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에 동참하는 모습이라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규범이 되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후 9:7).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헌금을 어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욱 귀히 여기는 동시에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그녀가 체험하도록 가난한 자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당시 유대 성전처럼 차별하고 착취하지 말고 초대교회가 결핍한 과부들의 생계를 도와주었던 것처럼(행 6:1)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도 초대받고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천국 잔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로운 신약의 성전인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인간의 성공과 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거나, 가난한 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면 그 책임을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와 신학에서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때 가톨릭교회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성경적으로 사실무근인 신학과 온갖 감언이설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조상에까지 적용되는 죄 사함, 천국 보장, 물질 축복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어 가난한 대중들에게 헌금을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 중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세상의 축복과 헌금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싶은 목회적 야망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복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며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곳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의 소굴일 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절박한 상황에서 전 재산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이야기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 칭찬하며 성도의 처한 상황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제발 반성해라!

(관련자료)

632회 사랑의교회 주일마당기도회 설교영상

https://youtu.be/VCaSG_yBv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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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진 2019-08-13 10:47:24
이런 말씀의 해석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과부의 헌금을 헌신의 절대지표로 말하면서, 기도하면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노치영 2019-08-13 08:40:18
확실히 말씀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분별하도록 가르쳐주시네요.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