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도 역시 '미제'가 최고인가?
복음도 역시 '미제'가 최고인가?
  • 박성철 목사
  • 승인 2021.02.10 0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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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로버트 슐러(Rober Schuller) 목사, 1990년대 새들백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 2000년대 윌로우크릭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의 빌 하이빌스(William Hybels) 목사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와 기독교출판시장에서 '미국의 유명한 목사들'은 높은 인기를 누렸다.

내가 한창 신학 공부를 하던 1990년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도 읽지 않는 이상한 책들이 정말로 많이 번역되었고 읽혀 졌다.

하지만 요즘 자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 때 그런 종류의 책을 사서 읽고 새로운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했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 중 지금까지 그들의 책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차이에도 여전히 읽혀지고 깊은 감동과 성찰을 제공하는 신앙인들의 글이나 책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미국의 유명한 목사들'의 글이나 책은 그런 종류의 것들은 분명 아니다.

왜 일까?

왜냐하면 말로는 훌륭한 설교 내용이나 복음의 열정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유명한 미국 목사들'의 대부분은 비교적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양적 성장의 정체를 우리나라보다 일찍 직면했던 미국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어내었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이들의 영향력은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더 강했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새로운 복음 전파의 방식이나 교회의 운영방식에는 집중을 했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갖추어져야 할 복음 전파를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가치 체계와 삶의 양식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무슨 무슨 전도법'이니 '무슨 무슨 처치'니 하면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미국에서 이들이 이룬 목회적 열매나 소위 '성공'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이들의 '목회 방식 자체'가 아니라 이들의 목회 방식을 '한국교회가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번영신학'이나 '재정 비리', '성폭력', 극우적 정치의식 등 이들이 직면했던 비판에 대해서는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한국교회가 미국식 목회 방법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미국 기독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사실 교회 성장 방식이라는 것은 일정한 법칙으로 일반화되기 어렵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이 세상에서 성장하지 못할 지역교회는 없을 것이다.

목사 개인의 매력도, 목회지의 상황 그리고 시대적 상황들이 절묘하게 결합해야 소위 말하는 '거대교회'(Megachurch) 하나가 탄생한다.

양적으로 성장한 교회를 분석하기는 쉽지만 그 분석이 다른 목회자나 지역 그리고 시대에는 잘 먹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미국 내 하나의 거대교회가 탄생하면 그 교회 담임목사의 목회 방식이 마치 보편적 방식인 것처럼 수입된다.

복음도 역시 '미제'가 최고인가?

미국 기독교에 대한 사대주의가 우리의 비판적 의식을 무력화시키기 않았다면 이런 식의 비판은 진작에 제기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교회의 미국 기독교에 대한 사대주의는 미국식 경제 체제에 대한 사대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기업경영방식이나 재벌의 성장방식을 자꾸 따라가기에 이런 이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업과 같이 교회의 특성화를 통해 양적 성장을 이룰려는 목회자들의 왜곡된 욕망이다.

'미제' 복음이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이면에는 교회를 특성화시켜 양적 성장을 이룰려는 목회자들의 욕심이 존재한다.

과거 한국교회를 뒤덮었던 다양한 세미나들을 생가해 보라!

전도폭발, 사영리, 제자훈련, QT 등등

한국의 목회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러한 다양한 방법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도구였던가?

도대체 그 당시 그들이 이야기햇던 '영적 성장'은 도대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말로는 '영적' 혹은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였지만 '급속한 양적 성장'을 위한 도깨비방망이를 찾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목회의 전문가가 되려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노력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혹자는 '미국의 유명 목사들'을 그 시대에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지도자로 평가한다.

그래, 좋다!

복음을 시대에 적합하게 쉽게 해석하는 것은 모든 전도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그토록 대중의 마음을 잘 읽어낸 것이라면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이 먼저 '미국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와 책에 열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습게도 현실은 일부 리더급 성도들을 제외하면 일반 성도들은 목사들 이름도 모르는데 목회의 전문가가 되려는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더 열광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혹시 스스로 직면한 현실을 놓고 기도하고 사유하고 성찰하기 보다 좀 쉽고 간편한 방법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던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대적 변화와 시대적 차이에도 여전히 읽혀지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들이 존재해도 목회자들이 그것을 스스로 읽고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작년과 재작년에 붐을 일으켰던 리디머 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팀 켈러(Tim Keller) 목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연 그는 다를까?

만약 팀 켈러의 글이나 책이 지금처럼 소비된다면 그 유통기한은 채 5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입장에선 그가 과거에 쏟아 놓은 이야기와 팬데믹 이후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2020년의 팬데믹은 한국사회와 미국사회 모두에 거대한 변화를 안겨다 주었다.

이젠 한국교회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미국교회에서 찾으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이들과 팀 켈러 모두 한국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복음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열한 호응을 얻었고 그들의 책을 번역해서 팔려고 기독교 출판사들이 판권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과연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였던 대안적 방식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각자가 각 시대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해 낸 측면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복음을 재해석할 필요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음을 재해석하는 데는 다양한 길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복음의 상업화는 그 다양한 길 중 하나는 아닐 것이다.

박성철 목사 페북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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