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교회
진짜 교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6.09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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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끼니를 먹고

시로 상처를 닦는 그녀를 나는 진짜 시인이라 믿는다

마경덕의 ‘냉이꽃 ㅡ윤준경 시인’이라는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시로 끼니를 먹고 시로 상처를 닦는 윤준경이라는 시인이 진짜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 시 아래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진짜 시인은 뭐고, 가짜 시인은 뭘까...

시를 가짜로 사랑한 시인도 있을까.

물론 시를 가짜로 사랑하는 시인은 없다. 그러나 시인 중에는 시로 끼니를 먹고 시로 상처를 닦는 이가 있다. 이들은 그냥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다르다. 시가 끼니이고 시가 상처를 닦아주는 마음이다. 결국 시가 모든 것이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마경덕 시인은 진짜 시인이라고 한 것이다. 진짜 시인은 진짜 시인을 알아본다. 아니 진짜 시인만 진짜 시인을 알아볼 수 있다. 시에 모든 것을 걸어본 시인이 진짜 시인이다.

나도 진짜 교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교회에 다니고 있거나 특히 특정 교회의 목사인 사람들이 들으면 매우 기분 나쁜 말이다. 나도 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모든 것인 사람에게는 진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교회가 있다.

먼저 한 번 생각을 해보라고 부탁을 드리고 싶다.

당신에게 교회는 어떤 곳인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더 좋은 교회가 있다면 교회를 옮길 생각이 있다면 당신의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다. 진짜 교회는 외형이나 교리에 의해 가려지지 않는다. 사실 진짜 교회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역사 속에도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교회를 진짜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이단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자신들의 교회만이 진짜 교회라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의 교회가 진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단이라고 여기는 교회들이 사실은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와 더 많이 닮았다. 하지만 외형뿐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외형이 완벽해도 진짜 교회가 아니다. 바로 이단들의 교회들이 그런 교회들이다.

오늘은 교회를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오늘 아침 어떤 목사님의 페이스 글에서 아래의 내용을 보았다.

"목사가 외로운 건 그렇게 사랑을 쏟아 붓고도 그 사람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으며, 목사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진짜 교회의 시작이고 목표라는 방향을 다시 잡게 된다."

이걸 깨닫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청빙을 통해 목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나이가 차면 그 목사는 교회를 떠나야 한다. 여기서 목사와 성도간의 자매와 형제 관계가 이미 깨져버린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자매와 형제들이다. 이들의 관계는 교회 안에 갇히지 않는다. 교회와 상관없이 그들은 이미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이들은 결코 자매와 형제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수직적인 종속관계를 형성한다. 목사가 모든 권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목사는 물러나야 한다. 아니 떠나야 한다. 이 둘의 관계에서 형제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고 그것을 제도로 고착시켜 놓은 이상한 곳이 된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목사와 성도의 구분이 없는 교회를 말해왔다. 그렇다고 목사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필요하다. 그 목사는 하나님의 학교를 통해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준비된 목사는 교회의 반석(게바)이 된다. 주님은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지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교회에서는 목사와 성도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된다. 사실 그럴 수 있어야 권력이 없는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성도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교회란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향해 갈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한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 목사는 한 대형교회의 목사의 문제로 떨어져 나온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사람은 그 예배의 설교를 섭외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을 하면서 이 사람은 신대원을 나와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교회의 목사가 될 수 없다. 교단이 다른 신대원을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목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교단이 다른 신대원을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청빙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청빙의 조건을 갖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그 모임도 기존의 교회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목사와 성도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교회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진짜 교회를 다시 말할 수밖에 없다. 진짜 교회는 목사와 성도의 구분이 없는 교회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교회이다. 그 교회의 성도가 목사가 되어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가 된 사람을 청빙하여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어쨌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가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목사와 성도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교회에서는 결국 헤게모니가 지배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이어라키를 형성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헤게모니 싸움이 영원히 지속되는 세상의 하부구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보는 모든 교회들이 바로 그런 교회들이다. 오히려 이단들이 이 틀을 깨버리고 모두가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이단이 아닌 교회들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단이라 여기게 되었다. 결국 이단이나 이단이 아닌 교회들 모두 가짜 교회가 된 것이다.

목사가 외로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시간이 되면 떠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함께 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동등한 자매와 형제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함께 살 수 있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교회로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그 다른 교회는 지역적인 거리가 존재할 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동질성을 가진 교회이기에 결과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최근 담임목사가 된 한 목사를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니 하나님이나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기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일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목사이고 다른 분들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로가 자매와 형제가 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빙을 통해 일정 기간 통치자로 군림하는 목사가 있는 교회는 결코 진짜 교회가 될 수 없다. 목사가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시인에게서처럼 목사에게 교회가 끼니가 되고 상처를 닦는 긍휼함이 되어야 한다.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교회는 필요조건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진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는 교회이다. 그 교회에는 통치강령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이다.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살면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은 기본이다. 그 목사를 발판삼아 모든 교인들이 합심하여 산상수훈을 살아내는 교회를 이룰 때 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된다. 나는 그 진짜 교회의 목사(가장 낮은 섬기는 종)가 되고 싶다. 진짜 교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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