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의 책임
공정의 책임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6.2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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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대표로 젊은 이준석이 선출된 후 공정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이준석 본인이 먼저 도마에 올랐다. 그의 병역비리가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이다. 산업기능요원(근 복무 대체)으로 근무 중이던 이 대표는 고등, 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SW 마에스트로 과정에 지원했고 거기에 합격하여 각종 지원을 받았다. 또 그가 산업기능요원으로 선발 될 수 있는 자격인 기사자격증이 있는가도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그의 그런 일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또 대구에서 열린 유 전 의원의 20∼40대 지지자 모임인 '희망22 동행포럼' 창립총회에서 진중권과 유승민이 보수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진중권은 이준석의 능력주의에 반대하며  "성공한 원인을 다 자기 덕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성공했기 때문에 실력 있는 사람이 독식하는 것, 그 사람이 특권을 잡고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은 차별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조국 사태 이후 또 다시 공정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된 것이다.

사실 공정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공정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공정이란 결국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먼저 나는 공정에 가장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20대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공정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같은 20대들이라고 공정에 대한 어떤 정해진 정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던 공정에 대한 불만이란 것이 사실은 그들의 분노의 일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현실에 대한 부조리를 느끼는 것은 까뮈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하는 삶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사회의 어떤 합의를 이루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 수만큼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부조리 역시 보는 사람의 위치와 그 사람의 세계관에 의해 다르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 

내가 공정을 오늘의 주제로 삼은 것은 이것을 정치가들에게 맡기면 그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들을 호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정이란 실체가 없는 중용과 같다. 물론 일반적인 공정의 의미마저 도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이 애초에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는 곳이다. 누가 나서서 아무리 공정에 대해 말하고 주장해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공정으로 자리매김하기란 불가능하다. 작금의 부동산 문제를 보라. 아무리 권력을 가진 정부가 나서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시장의 자유에 맡겨 놓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성인군자로 살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정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한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공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레미야가 생각난다. 그는 예루살렘이 망하기 일 년 전인 주전 589년에 사촌인 하나멜 소유의 아나돗의 밭을 사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생각해보라. 정말 미친 거래가 아닌가.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다. 더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이다. 그런 사람에게 와서 자신의 밭을 사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밭을 사라고 명령하셨다. 아무리 예언자라도 그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밭을 은 열일곱 세겔을 달아 주고 사서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봉인하였다. 증인도 세웠다. 

누가 생각해도 공정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정하지 않은 것을 명령하신 이는 주님이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었고, 자기들이 지금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각 지파들에게 분배해주신 것이라 여겼다. 비옥하든 척박하든 지금 살고 있는 그 땅이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땅에서 얻은 수확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가난에 몰리기도 했다. 땅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람들은 땅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희년을 제시한다. 매 오십 년마다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주고, 종살이 하던 이들을 해방시키고, 다른 이에게 팔았던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정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땅은 공적 자산이다.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 인간들이 될 때 생기게 될 불평등과 계급을 불식할 수 있는 방법을 율법에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정은 사라진다. 

내가 지금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공정이란 초점이 필요하다. 율법은 그 초점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용골추처럼 공정을 바로 세우신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용골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생각은 해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공정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문명의 정상성’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공정이 화두가 되지 않았던 사회도 없었지만 공정해진 사회도 없었다. 공정은 정치가들의 단골 화두가 되지만 그것을 실현해내는 정치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포청천과 같은 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밭을 샀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거래를 한 것이다. 아니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복음의 급진성을 떠올릴 수 있다. 복음이 급진적이라는 말은 복음대로 사는 것,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의미한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라. 우리가 급진적인 복음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밭을 산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회복될 예루살렘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고 미쳐 보이는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가. 그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당신도 예레미야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은 멸망을 일 년 앞둔 예루살렘의 땅을 사는 것과 같이 보일 것이다.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같은 명령을 내리신다. 망하라는 것이 아니다. 희망의 상징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집 있는 자와 땅 있는 자가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예레미야에게 있었던 계약서마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에 넘쳐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는 샬롬을 누리며 살았다. 복음은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 우리도 그들이 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들이 누렸던 샬롬을 누리라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는가. 겁이 나는가. 당연하다. 
왜 믿지 못하고 겁이 날까. 돈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은 분명 어리석고 미친 자들이다. 그러나 희망은 그런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공정의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결론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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