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진보가 신학적 진보로 이어지길
기술적 진보가 신학적 진보로 이어지길
  • 김기대
  • 승인 2022.02.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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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목회

20세기가 끝나갈 즈음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미국장로교(PCUSA) 소속 한인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교회에는 부임했지만 노회의 형식적인 인터뷰 절차가 남아 있었다. 미국 장로교 내에서도 진보적이라고 소문난 태평양 노회(The Presbytery of the Pacific)였던 터라 나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종교간의 대화, 성소수자 이슈, 석사 논문을 불교로 썼다는 이르자 주로 백인들로 이루어진 인터뷰어들의 표정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인터뷰 말미에 이력서를 확인한 어떤 이가 이메일도 쓰는구나!”라고 했다. 이건 무엇? 내가 뜨악해 겨를도 없이 그들은 자기들끼리 놀란 표정을 교환했다. 한국 전쟁 직후에 미국에 도착한 한국 사람 정도로 이해하는건가라는 생각은 괜한 피해의식이라는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 그들에게 이메일은진보 표식이었고 그래서 연대의식을 확인하는과정에서의 놀람이었다.

 

나의 이메일 사용에 놀랄 정도로 늦었던 그들의장비 내가 데스크탑에 머물러 있을 슬림형 노트북을 선점(?) 하더니 이어서 스마트 폰으로, 테블릿으로, MS Surface 빠른 속도로진보했다. 영어 친화적인 컴퓨터 언어 때문이지 몰라도 시작은 미약했던 사람들의 진보는 엄청났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새로운 기기에 익숙해져 갔다. 그들의 겉사람은후패 갔지만 한국 같으면태극기 부대 불릴만한 세대들이 기술의 진보와 함께 미국 장로교의 여러 진보적 의제들을 견인해 갔다. 기술의 진보가 역사의 진보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였다.

지메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진보적이라는 진영 분석도 있었지만 구글이 검색 엔진 시장을 석권한 이후로 구글은진영 아니라보편 되었다. 애플은 끝까지 보편보다는진영 택한 것처럼 보인다. 초심을 잃어가던 페이스 북이 진영 논리의 판에메타 변신한 뛰어 들었다. 메타버스의메타에는 아무말 않던 여론이 페이스 북의메타에는 히브리어의죽은 발음이 같다고 몰아부쳤다. ‘죽은 여성형 형용사 미타(mi-ta) 비슷할 뿐이지만 여론은 회생의 몸부림을 치는 페이스북을 곱게 보아주지 않았다. 기술 발전은 진보의 아젠다라는 점을 에둘러 비판한 반응이었다.

기술적 진보에 먼저 다가간 진영이 진보인 맞다. 대한민국에서도 초기에는 커뮤니티들이 진보적인 의제들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일베나 극우 유튜브가 뒤늦게 전장(시장?) 뛰어들었다. 보수적인 그들이 쏟아내는 내용들은 한결같이 퇴행적이라는 점에서 IT 발전이 진보의 영역인 점은 변함없어 보인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03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하워드 (지금의 버니 샌더스 분위기였다)에게 적은 후원금을 보낸 적이 있는데 (Zoom) 없던 시절, 어떤 형태였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튼 온라인에서 소통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다. 반면 2009년에 시작한 보수적 티파티(Tea Party) 때도 오프라인을 강조했다. IT 본고장이 미국이라면 대한민국은 IT 선진국이다. 미국에서 한인 목회 하는 사람에게 이런 주제의 원고 부탁이 들어온 까닭은 IT선진국 출신의 이민자가 IT본고장에서 메타버스를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의도였을 것이다.

문송’(문과라서 죄송)스럽게도 나는 용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AI 등은 알고 있지만 지금 수준은 이런 편린들의 종합이 메타버스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의호황 의미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터라 번은 정리해 보고 싶었다.

 

메타버스 시대에 신학과 목회? 이런 화두가 의미를 가지게 것은 코비드 19으로 인한비대면예배라는 낯선 용어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정치, 국가 개입 등으로 비대면예배에 비판적이었을 법한 진영이 우호적으로 바뀐 데는 아마도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의 신천지,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초기 방역 성공에 대한 질투 세력이 했으리라!

비대면예배가 시작되자 기독교내에서도 진보 보수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이른바 진보 기독교내에서의 반응은 고작비대면 예배 예배라는 주장 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모이지 말라는데 꾸역꾸역 모이는 신천지류의 교회들에 대한 조롱만 있었지 새로운 성찰은 없었다. 나는 백신도 열심히 맞는 백신음모론자가 아니라는 밝히고 하는 말이지만 국가 방역이 주는 생명정치의 우려에 대해서 진보는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푸코에서 시작된 생명정치 개념은 주권자의 죽일 있는 권리가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으로 바뀌어 얼핏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으로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개념으로 아감벤이 발전시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조르조 아감벤이얼굴없는 인간’(박문정 옮김, 효형출판, 2021)에서 제기한 인문적 사유 같은 성찰이 신학과 목회에서는 불가능할까? 정치 철학이 실종되고 정치신학이 대두되었을 슬라보예 지젝이나 조르조 아감벤 같은 사람들에게성찰 넘겨준 것도 결국은 신학의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메타버스 시대에 신학과 목회같은 기획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메타버스 버스가 Bus 아니라 Universe verse라는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의 사고는 Bus 머물러 있다. 어떤 신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운송도구로서의 버스 말이다. 지점에서 교회가 어떻게 생존할지에 대한 도구적 고민만 있지, 내용에 대한 성찰적 고민은 없어 보인다. 신학과 목회는 방편(도구) 아니라 내용인데 내용의 핵심인 Verse(Text) 대한 깊은 성찰을 현실의 논의에서 발견할 없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신세계는 버스(Bus) 종점으로서의 지점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텍스트(verse) 만드는 세계가 메타버스의 진정한 결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의 진보가 역사의 진보를 역행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붕괴된 그곳에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끝나고, 생태계가 온전히 보전되고, 여러 소수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는 그런 신세계 말이다.

새로운 텍스트가 쓰여지는 , 그리고 실천되는 (Context) 메타버스의 종점이다. 

<이 글은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목회"(동연, 2022)에 실린 필자의 글을 옮겨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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