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이 가난한 교회
장로님이 가난한 교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2.16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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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의 독자는 당연히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거나 교회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남아 있는 분들이다. 내게 친구신청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목사님들이거나 전도사님들이시다. 가끔씩은 장로님들도 계시다. 나는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의 친구신청을 거의 수락하지 않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있을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매우 폭력적이다. 자신의 생각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버릇이 아마도 이분들에게 그런 성품을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예외적인 분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친구신청을 가장 수락하지 않는 분들은 장로님들이다. 이분들은 모두 신실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주님이나 말씀에 신실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신실하신 분들이다. 이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 믿는 분들이다. 그래서 평생을 교회를 위해 한 헌신을 추호도 의심 없이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라 여긴다.

장로님들과 비슷하게 내가 피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깨어 있는 분들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감동을 가장 먼저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분들 역시 내 글의 독자로서는 적절하지 않다. 이분들의 깨어 있는 의식이 내 글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늘 말하는 교회가 우상이라는 표현에 이르면 마음이 닫히거나 분노가 치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사람이건 기술이건 물질이건 미적 감각이건 가치관이건 마찬가지다. 그러려면 최소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참고 바라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주님의 불꽃같은 연단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

래리 크랩은 자신의 손녀를 위한 축복기도에서 손녀에게 좌절된 꿈을 허락해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그가 언급한 좌절된 꿈이란 무엇일까. 왜 그는 교회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만사형통을 주장하지 않을까. 나는 그가 말한 좌절된 꿈이란 것이 바로 주님의 연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연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좌절된 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대의는 자발적 동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강력한 올무에 빠져있다. 그 올무가 바로 만사형통이다. 올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목사님 올해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덕담을 건넸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덕담이야말로 신앙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누가복음의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아브라함은 온갖 호사를 다 누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것이 지옥에 가게 된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호사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사를 누릴 때도 있다. 그러나 호사를 누릴 때 그리스도인은 자기 상 아래에 있는 나사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사로를 불러 일으켜 자기 옆에 앉히고 자기가 누리는 호사를 함께 누려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부자로 살 수가 없다. 부자들의 눈에는 나사로와 같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각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이다.

얼마 전 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되신 분이 올린 글을 보았다.

“일평생 교회를 위해 충성했는데 몸은 아프고 여전히 노년에 새벽부터 일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있겠지만 그날까지 이 땅의 삶은 너무 고단하다. ‘주님!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도우소서! 영육 간에 건강 주시고 너무 고단한 삶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분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장로님 부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이분은 그 가난한 장로님이 부자로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가난한 분이 장로인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나라면 그런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것이다.

나도 안다. 지금 가난하고 늙은 은퇴 장로님도 한 때 잘 사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부침이 있었고 그분은 가난해지셨고 이제 늙기까지 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그것이 안타깝기만 한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분이 가난해지셔서 세상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고 섬기는 손이 되고 다가가는 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난한 장로님이야말로 그 교회의 축복이 아닐까. 오늘날 교회와 목사들의 모든 일탈은 그런 분들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잔인한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가난한 장로님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해서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다. 교회의 장로에게 참된 신앙보다 가치 있는 다른 것이 있을까. 없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로님이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정상으로 여긴다. 그 생각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亡兆(망조)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말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것이다.

나도 안다. 내가 하는 이런 말을 받아드릴 수 있는 장로님들은 안 계시다는 걸. 그래서 나는 내게 오는 장로님들의 친구신청을 거의 수락하지 않고 있다. 그런 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담임목사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로님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가난한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지만 가난한 장로님은 보기가 어렵다. 어쩌다 있는 가난한 장로님들도 자신들이 가난해서 교회의 축복이라는 생각보다는 그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한 장로님이 계셔서 기뻐하는 교회를 보고 싶다. 가난한 장로님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목사님도 보고 싶다. 그래서 땅이나 집을 가진 교인들이 그것을 팔아서 목사에게 가져오는 교회를 보고 싶다. 각 사람의 필요가 채워져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교회를 보고 싶다.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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