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시와 아비투스
아미시와 아비투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2.1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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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역사 속에는 오늘날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빈번하다. 나는 오래 전 한 책을 번역하다 그 책의 부록에 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메노 시몬즈의 글을 번역하였다. 같은 영어가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실감했다. 그러나 영어의 고어를 번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보다 더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었다. 메노 시몬즈가 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다른 종교개혁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메노 시몬즈가 개혁을 시도하게 된 것은 성서를 처음 읽고 교회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부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신부가 성서를 읽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 당시는 오늘날 개도 소도 목사가 되는 것처럼 아무나 신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를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은 신부가 있었고 메노 시몬즈가 바로 그런 신부였다.

우리 집에는 성서가 몇 권인지 모를 정도로 다양한 성서가 여러 권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서 몇 권을 집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부가 성서를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적어도 교회의 중직자가 되려면 성서 통독은 기본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가톨릭에서 평신도들에게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불과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아직도 여전히 성서의 해석은 평신도들의 몫이 아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런 가톨릭의 관습을 독재적인 것이나 성직자들의 횡포로 이해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독재적인 것이고 성직자들의 특권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성서 통독을 아주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라. 그 사람이 성서를 많이 읽어서 정말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런 경우가 없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성서를 많이 읽어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가. 시편에서 말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되는가.

적어도 개신교 신자들에게 성서를 여러 번 읽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확고하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그토록 많이 읽었다는 분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그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자아가 강하고 권위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통찰을 우리는 아미시로부터 얻을 수 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로 우리에게 인식된 아미시는 일상에서 성서를 읽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를 교회에 갈 때 타는 마차에 실어놓고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을 들고 가 사용한 후 다시 마차에 그것을 보관한다. 마치 오늘날 선데이크리스찬과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성서를 읽지 않는 것은 자의적 해석이라는 올무에 걸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서를 공동체적으로 해석한다. 나는 이러한 아미시들의 성서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에는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혹은 영적 독서)라는 성서 읽기 혹은 기도의 방식이 있다. 개신교에는 큐티(quiet time)라는 것이 있다. 특히 개신교의 큐티는 아미시가 걱정하는 대로 자의적 해석이라는 올무에 빠지기가 쉽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공동체적 성서해석이라는 아미시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 이해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을 유지해주는 끈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 나라 관점을 가지면 복음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면 그들의 그런 성서관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글들을 쓰면서 나는 성서를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라는 사실을 절감切感했다.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는 말씀이 녹아들어 있는 행위이다. 그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반사행동이 되게 하는 것은 곧 말씀의 체화라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아미시들 역시 아비투스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순종과 겸손과 검소함을 그리스도인의 덕으로 인식하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것을 이루어내는 과정과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비투스를 만들어 그것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미시의 언어는 독일어이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는 아주 다른 언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언어는 독일어의 고어古語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일어 고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문화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대다수의 나라들이 흠모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미국에 동화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들의 세계관이 철저하게 신앙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고 전기의 힘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쇄국정책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적 성서해석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 함께 성서를 읽고 해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서의 의미를 담은 그들의 아비투스를 형성하고 지켜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오래도록 왜 한국인 아나뱁티스트들에게서는 아미시나 메노나이트들이 보이는 삶을 볼 수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의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성서이해를 배워왔다. 그러나 한국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성서이해가 아니라 복음이 녹아있는 그들의 아비투스였다.

아미시들에게 신앙의 삶이란 성서를 보고 또 보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겸손과 검소함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덕을 형성하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공동체의 삶을 통해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미시들은 그런 삶을 오백 년 가까이 살아냈다. 그리고 지난 2003년에 있었던 ‘아켈마인 총기 사건’(나는 이 사건을 다른 글들에서 여러 차례 소개했다)을 통해 자신들의 아비투스를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를 실천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복음을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아비투스(반사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를 보고 미국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았다. 한동안 신학적인 토론이 이곳저곳을 장식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교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가 가지는 한계이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말씀은 육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말씀이 될 때 성서는 우리 가운데 살아난다. 그것이 바로 초기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였다. 아미시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씀이 되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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