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아우구스티누스(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3.18 0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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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임목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목사와는 교제를 하지 않는다. 담임목사라는 말에는 권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과거에 나는 홍정길 목사님을 존경했다. 그분은 담임목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교회의 모든 목사를 목사로 부르게 했다.

이것이 왜 존경의 이유인가. 그것은 권위를 부리지 않는다는 상징임과 동시에 모든 목사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남서울교회에서는 모든 목사의 급여를 동일하게 지급했다. 나는 남서울교회 이외에도 주님의교회와 샘물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 샘물교회에서는 목사들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런 교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다. 이것이 훼손되면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일 수가 없다. 오늘도 기사 하나를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교역자들은 교회 조직의 일선에서 여러 '구조 악(Structural Evil)'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대신 감당해 줄 총알받이로, 또 가슴을 후벼 파는 거친 언어를 함부로 쏟아 내도 괜찮은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취급받으면서 말입니다. 제가 부교역자 생활을 정리할 때가 되니 비로소 깨닫게 되더군요. 왜 신학교에선 순진하고 착했던 많은 사람이, 부교역자로서 연차가 쌓여 갈수록 히스테릭하고 괴팍한 성격들로 변해 가는지. 가르마 비율까지 정리해 가며 뒤집어 써야 하는 짙은 종교적 가면 뒤에서, 그들의 인간성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출처: 뉴스앤조이] 고통받는 부교역자들을 위한 항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보인다. ‘구조 악(Structural Evil)’이라는 단어이다. 부목사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구조 악이라는 지적은 옳다. 구조 악이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계급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계급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에는 구조 악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가 담임목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담임목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목사와 교제조자 하지 않는 이유는 담임목사라는 단어 자체가 계급을 형성하고 구조 악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담임목사라는 단어는 너무도 공고하다. 그 사실은 담임목사의 권위가 공고하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권위가 있는 곳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권위가 있는 곳에는 구조 악이 존재하고 하나님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 나라는 역삼각형구조라는 말도 많이 들어왔다. 세상의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형태를 말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역삼각형구조 역시 반대한다. 하나님 나라는 평면이다. 역삼각형구조 역시 권위가 존재하는 구조이다. 하나님 나라의 섬김은 권위를 무력화시키는 도구이지 권위를 뒤집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든다. 섬김을 받는 사람도 군림해서는 안 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 말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에서 나는 권위가 느껴진다.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신도라는 단어 자체가 없어야 한다. 여전히 권위가 존재하는 곳에서 평신도들이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권위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평신도를 깨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공고히 자리하고 있는 계급 구조를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구조가 사라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목사의 입장에서 그것을 깨닫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목사의 입장에서 그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목사가 스스로 자신이 권위에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러니까 평신도를 깨울 것이 아니라 목사가 깨어나야 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위치한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반석, 곧 발판의 자리로 내려가야 했다.

목사들이 그것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교회 안에 계층의 사다리가 놓인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그것이 너무도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계층의 사다리를 놓은 것은 콘스탄티누스이다. 누차 언급한 것처럼 그는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로마였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로마를 유지하는 수단인 폭력과 살인을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생각해낸 묘책이 바로 성직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살인을 할 수 없었고, 살인과 관련된 직업 자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군인과 법관과 같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황제도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로마를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묘책은 그리스도인들을 살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성직자)과 살인을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평신도)로 구분한 것이다. 평신도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을 나눈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인정하고 그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든 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구분에(성직자와 평신도) 더해 수도자라는 또 다른 구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계급을 더 공고하게 고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그리스도교를 견인하던 인내에 제한을 가하고 그것을 사랑에 복속시켰다. 인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차단했던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조급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조급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인식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콘스탄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그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수도자들이다. 그는 인내를 평신도가 아니라 수도자와 성직자들의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수도자들은 계속해서 인내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수도사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인내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인내를 구현하는 독특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적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과 가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로 구분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saeculum)에 속한 일을 하는 신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의 교사들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 평신도는 그들의 일을 통해 사회가 기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일을 수행한다.… 그들의 일은 교회에게 중요하다. 그들의 수입이 교회의 필요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그들의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길이 어떻게 그들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켜 다른 이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p.477-47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교회의 구조를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이해와 조치가 교회 안의 하나님 나라를 와해시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교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회 속에서 구조 악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평신도를 깨우고 '시노달리타스'를 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문제는 여하히 교회 안에 공교히 형성된 이 계급구조를 허무느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길이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을 변화시켜야 다른 이들을 믿음에 이루게 할 수 있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이해로 우리가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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