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시온산 제국만큼만 해라
한국 교회, 시온산 제국만큼만 해라
  • 김기대
  • 승인 2022.04.1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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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어쩌다가 맛을 잃었나

해방을 눈 앞에 둔 1945년 6월11일 미국 전쟁성 산하 통신보안국은 조선총독부에서 도쿄의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첩보내용을 도청해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태평양전쟁의 전세 반전 이래 조선인들의 정서가 불안해지면서 발생한 특이할 만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경상북도(조선의 남동부 지방)에서 발생한 이른바 ‘시온산제국’ 사건이다. … 이들 일군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일본의 붕괴 및 연합국의 필연적 승리를 전파하며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공포했다. 또한 ‘주일본 한국총독’을 포함한 약 600명의 관리를 임명하여 연합군의 조선 상륙 환영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 질 때마다 승리의 축제를 열었고,1600개의 시온 왕국기를 제작해 두었다. (신동아 인터넷판 2004년 5월 31일자에서 재인용)

 

신동아의 ‘일제 말기 일본패망운동 벌인 시온산제국 스토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황일도 기자는 병석에 있던 시온산제국의 마지막 남은 대신(大臣) 정운훈 노인(인터뷰를 하던 2004년 당시 83세)을 인터뷰했다.

시온산 제국이 뭐길래 대신이라니! 시온산 제국은 1907년생인 박동기가 세운 신흥종파였다. 그는 1926년 대구 동산 성서학교(계명대학교 전신)를 마치고 조사(전도사) 생활을 하던 중 신사참배 압박이 심해지자 기도에 들어갔고 1940년 11월 29일 신비체험을 하면서 새로 설립한 종파였다.

1991년경으로 추정되는 박동기 목사 내외 사진-아들이 영남일보에 제공한 사진이다
1978년경으로 추정되는 박동기 목사 내외 사진-아들 박건한 목사가 영남일보에 제공한 사진이다

 

그들은 일본 제국에 대항해 종파의 이름을 시온산 제국이라고 짓고 전권 총리와 6개 부서(내무 농무 외무 사법 문부 대장)와 일본 총독, 육해공군 사령장관 모두 9개의 조직을 두고 각각 대신을 임명했다. 황일도 기자가 만난 정운훈은 제국의 농무대신이었다. 그밖에 임명된 관리가 600여명이었다고 하니 영화 ‘암살’에서 임시정부를 방문한 약산 김원봉에게 백범 김구가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달랑 3명을 소개하던 장면과 비교하면 훨씬 ‘거대한(?)’ 조직을 갖춘 셈이다.

9개 ‘제국 부처’는 모두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별호로 삼았다. 예를 들어 농무부는 평화였다. 현대의 펑화 운동가들이 말하듯이 평화의 화(和)는 벼(禾)와 입(口)이 합친 한자다. 농업과 평화, 매우 적절한 조합이다. 일본총독(일본이 패망하면 시온산 제국이 일본에 총독을 파견한다는 구상)의 별호는 ‘온유’다. 일본의 폭압정치를 ‘칼에는 칼’ 로 대응하지 않고 온유하게 다스리겠다는 의미다.

 

농무대신 정운훈은 ‘시온산 예수교 장로 교회사’라는 책을 쓰기도 했으니 열성 신도 였음에 틀림없다. ‘예수교 장로회’는 동산성서학원에서 공부한 박동기의 교단적 정체성을 고려했던 것 같다. 이단 전문가 탁명환에 따르면 해방 후 이들은 교주 박동기를 따르는 파, 시온산 예수교 장로회 황유하파, 서석윤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동아 인터뷰에서 정운훈은 교주 박동기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교리는 단순했다. 기본적인 장로교의 교리 위에 휴거와 일본 패망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들은 보통의 천년운동가들이 요한계시록을 선호했던 것과는 달리 다니엘서를 선호했다. 또한 시온산 제국은 1945년 4월 25일을 시온의 유월절로 선포하고 건국 기념예배를 그들이 은신하고 있던 산막(청송의 수락 마을)에서 거행했다. 그곳의 지세(地勢)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송 수락은 심산유곡에 자리하였으므로 내왕하는 신도들은 고생이 많았다. 그것은 자동차의 내왕하는 차편이 많지 못하고 어려운 전시하에서 차로 내왕하는 것은 관헌들의 눈에 뜨이기 쉽기 때문에 보행이 많았다….그러나 성도들의 발걸음은 빠르고 또 보행하면서 예언서를 암송하기 때문에 그 보행은 힘차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었다. 고개길도 순식간에 넘어가는 것이었다. (시온산 예수교 장로회 선교위원회, ‘십자가의 영광’)

 

4월 25일이면 독일의 베를린이 완전히 함락되기 전이다. 산골의 이들에게 독일의 전세가 불리하다는 외신이 전해졌을리도 없고 일본이 그런 보도를 허용했을 가능성은 더 없다. 도대체 건국을 선포한 확신의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미국 통신보안국 문서
미국 통신보안국 문서

 

이들의 주장과 선포는 치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총독부와 그곳을 도감청하던 미국 측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큼 당찼다. 신도들의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모여서 집단 생활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동하여 겨우 내 움추려 있던 농부들이 들녘에 나와서 농경일을 시작하였다. 양대우 집사님도 보현산의 산막 생활을 청산하고 수락동에 와서 주추 밭골의 넓은 밭에 감자를 심고 산돼지를 막기 위하여 나무가지로 울타리를 만들고 전에 있던 작은 막은 그냥 두고 골짜기 쪽에 새로이 크게 막을 지었다. 막을 지은 목적도 산돼지도 막을 겸 성업(聖業)을 거기서 하기 위함이었다.(위의 책)

 

은거하기 좋은 지세였다고 그들은 믿었지만 그해 5월 21일 새벽에 들이 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박동기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기에 이른다.

일본 교회사가인 베이커(R.T Baker)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극단적 경건주의의 성격을 가진 전천년왕국종파는 전 한국을 통털어 일본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실례의 하나이다. 그들의 목사는 공공연히 연합군의 승리를 기도했고 일장기나 신도(神道)의 모든 상징들을 닥치는대로 모두 불태워버렸고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교회의 문을 닫고 그와 관계된 신자 목사들을 탄핵했다. 순교자로서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녀들에게 신사참배에 굴종한 학교에서 바빌론식 교육을 받게 하기 보다는 학교를 그만두게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일본 당국으로부터 상당히 고초를 겪었고 또한 한국내의 모든 장로교 기관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이 살해되었다. (베이커, ‘Darkness of the Sun’)

 

시온산 제국에게 기성 교회를 문닫게 하고 목사들을 탄핵할 힘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베이커의 눈에는 상당히 강력하게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베이커가 말한 3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박동기는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가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미국에게도 곧 실망했다. 해방 후 3차례나 수감되었었고 빨갱이로 조사를 받은 적도 있는데 이 때 조사한 경주 경찰서 형사는 해방전 청송 수락마을에서 연행된 그를 조사하던 그 형사였다. 이처럼 해방 후에도 시온산 제국을 향한 핍박에 계속되었던 상황을 신동아의 황일도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첫번째 희생자는 시온산제국의 일본총독이었던 황모 목사였다. CIC(Count er Intelligence Corps·미군방첩대·해방후 미 24군단 아래 설치되었던 정보기관) 대구지부의 협력자였던 인근마을 청년 몇몇이 그를 좌경분자로 밀고한 것이었다. 태극기 반대도 보안법 위반이라는 논리였다. 반야월에 살던 박모 장로도 황 목사와 같은 혐의로 CIC에 체포당해 끝내 남로당원들과 함께 코발트광산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주검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경산에 살고 있던 김모 장로 또한 마을 청년단장의 밀고로 CIC에 끌려갔다. 태극기에게 경례하라는 조사관들의 요구에 끝내 불응한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시온산교회 구성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순교자’의 주검을 거두어 골짜기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한때 ‘하나님의 군대’라 믿었던 미군에 대한 분노도 점점 커져갔다. 미군이 도로변 가정집에 침입해 부녀자를 유린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강간과 약탈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이들은 결코 하늘의 군대일 수 없었다. 금호강변에서 과수원을 하고있던 한 신도는 자신을 덮친 미군병사를 피해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내 이겨낸 자신들 대신 ‘신사참배의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변절자들과 점복의 무리들’을 편드는 UN군은 이제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에 경험했듯이 그들은 ‘빨갱이’로 취급되고, 독립된 대한민국이 저지른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됐다.

 

무속과 신천지로 기울어진 새로운 권력에 잘보이기 위하여 한국 교회가 바빌론의 음녀 같은 짓을 서슴지 않는 시절을 살고 있다. 이 사건을 두고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났다고 분석한다면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비아냥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약자에게는 배타적일 것이며 강자에게는 비굴할 것이다. 시온산 제국의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강자에게 대들었던 그 '이단의 정신'만은 높이 사야한다. 이런 기백마저 내 팽개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서글프다.

2020년 대구 매일신문에 시온산 제국의 찬송가집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심층기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집중되어 있다. ‘자주’를 고민하던 시기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나 싶어 더욱 서글프다. 영화 '암살'의 명대사를 하나 더 인용하자면 조진웅이 하정우에게 건넨 말, "요즘 조선의 돼지는 XX을 까서 맛이 없어졌다"는 그 말이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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