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야기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4.29 0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말 만나고 싶은 분이 있었다. 내가 목사후보생으로 추천을 받았던 교회를 같이 다니던 권사님이다. 그분과의 여러 인연이 있다. 특히 신학교를 다닐 때 신학생들이 가난하다는 내 말을 들으시고 그분은 양복을 이백여 벌 준비하여서 신학생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와이셔츠는 천 벌 이상을 나누어주었다. 아무리 옷을 싸게 산다고 해도 그 정도의 옷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 그분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분의 사위가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노량진이 침수되었을 때 감전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약속 때문이었다.

내가 그 교회를 떠나며 담임목사의 호출을 받아 갔을 때 담임목사는 내게 한 가지 약속을 하라고 했다. 내가 교회를 떠나는 순간부터 영원히 교회 교인들에게 사적으로 연락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어떤 연락도 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라는 일방적인 요구였다. 나 혼자에게만 받은 약속이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오라고 해서 아내와 함께 한 약속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황당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만일 내가 그 약속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나는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약속을 나는 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걸어서 교회를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버스를 타고 교회 앞을 지나가도 그 교회를 쳐다보지 않았다. 교회를 함께 다녔던 인연 때문에 자녀들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혼주에게 축의금 봉투를 전달하는 것으로 초대에 응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고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권사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영장에서 만난 한 청년이 그 교회의 목사님이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은퇴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목사가 징검다리 세습을 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권사님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같은 노회에 내 중·고등학교 동창인 목사가 있다. 우연히 전화 통화를 하다 내게 약속을 요구했던 담임목사가 여집사와의 불륜이 들통나서 그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로목사로 인정만 해주면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요구를 노회에 청원했지만 그것이 거절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그 목사가 그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권사님에게 연락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우연히 인근의 맛집인 빵집을 찾았다가 그 교회를 보았다. 빵집엘 몇 번 갔다가 갑자기 권사님 생각이 나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 권사님의 근황을 물었다. 아직 살아계셨다. 그러나 내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내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놓았다가 권사님이 오시면 전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권사님이었다. 그리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병원엘 매일 다니시는 모양이었다. 식사도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갔던 빵집에서 차나 한 잔 마시는 걸로 정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물론 가장 먼저 부군의 건강(사실은 생사)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남편을 불시에 잃었던 따님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사건이 권사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권사님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이유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내가 지금처럼 살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고민이다. 나는 지금의 내 상태를 감사한다. 내가 목회에서 성공하여 큰 교회를 이루고 공부도 더 해 강의도 하고 그런 것이라면 쉽게 설명하고 함께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쫄딱 망한 내 감사함을 전하기란 어렵다. 그러려면 내가 알게 된 복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이야기를 과연 말하는 것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기왕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계신 분들에게 내가 아는 복음을 전하거나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난감하다.

더구나 권사님은 나의 성공을 확신하던 분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분은 내가 특출하다고 생각하셨던 분이시다. 그런 분에게 내 패가망신의 하나님 나라 은혜 이야기를 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은혜라는 생각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신앙의 길에서의 성공이 얼마나 치명적인 올무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는 정말 존경스런 목사님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볼 수 있을까. 아마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이다. 큰 자가 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가 없다. 그렇다. 부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야 한다. 실제로 커지지 못했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크고자 하는 욕망이 남아 있어도 하나님 나라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넓은 길을 가고 있는가.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그분들이 가고 계시는 그 길이 멸망의 넓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가 없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에 소망을 걸고 계시다. 안타깝다. 그렇게 오래도록 인간의 어떤 노력도 구원에 일도 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듣고 또 들었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신실함에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신실하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다. 그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신실해도 그것을 신실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실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중심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중심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신실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기에 편승해 자신의 신실함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대형교회 목사가 되거나 유수한 신학자가 되거나 이웃 가톨릭의 경우는 사제가 되거나 대주교가 되거나 추기경이 되거나 교황청 장관이 되는 것을 성공과 은혜로 인식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반대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런 자리에서 도망을 가야 한다. 거듭 도망을 갔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방식이다. 그런 후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첼레스티누스 V.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그는 정치적인 추기경들에 의해 멍청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교황이 되었다. 생각대로 그는 멍청했다. 교황이 된 후에도 교황청 안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지냈다. 교황의 관이나 옷을 입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들의 생각대로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추기경들의 정치판에 놀아나지 않았다. 도무지 권력에 대해 무심한 그를 정치 추기경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그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런 후에도 추앙을 받는 그를 자객을 보내어 죽여야 했다. 첼레스티누스 V.의 이야기는 모든 커지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간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이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라. 그는 최고의 유대교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그가 결국 어떤 상태가 되었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나도 주님의 은혜로 “이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전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권사님에게 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지금 하고 계신 신앙생활을 잘 하실 수 있도록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내 안타까운 마음을 아실 것이다. 성령께서 내 대신 권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나는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