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교주였나 후원자였나?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교주였나 후원자였나?
  • 김기대
  • 승인 2022.05.2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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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부활’을 쓴 이유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러시아에서 모스크바가 대공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반 3(재위 1462~1505) 스스로 짜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시기에 정교회에도 여러 변화들이 나타나는 하나가 이단의 출현이었다. 모스크바에 비해 문화적 경제적으로 앞서 있던 노브고르드 지역은 모스크바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부정적이었다. 종교개혁을 전후해 유럽에 퍼지고 있던 이단 운동들이 노브고르드 지역에 유입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였다.

14세기 말에는 스뜨리골니끼(삭발파) 잠시 위세를 떨쳤고 1470 경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교묘히 섞은 유대주의파가 등장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반 3세가 이들의 언변에 반해 비밀리에 개종을 하고 그들의 성직자 명을 크렘린 성당의 주임사제로 임명할 정도였다. 1490년에는 유대주의파의 성직자 조시마가 모스크바 수좌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공교롭게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나오는 막내 아들 알료샤가 존경하며 따르는 인물 이름도 조시마다).

모스크바가 제 3의 로마( 제 2의 로마는 콘스탄티노플)라는 생각에 젖어 있던 러시아의 그릇된 믿음은 이단의 사설에 쉽게 넘어갔다. 이반 4세가 1584 사망하자 러시아는 스웨덴과 폴란드의 침공, 러시아 내부의 공국끼리의 전쟁으로 로마노프계 황제가 즉위한 1613년까지 종교, 정치 모든 면에서대혼돈기smuta’ 겪는다.

대혼돈이 진정되자 이번에는열성신도파(하나님의 총애자)’라는 새로운 종교집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단이라기 보다는 글자 그대로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열성신도들의 모임이었다. 열성신도 출신의 명이 러시아 종교계에 두드러진 역할을 하면서 대혼돈기가 끝나기 무섭게종교대분열raskol’ 시작되었다.

명은 1652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부임한 노브고로드 수좌 대주교 출신의 니꼰과 다른 한명은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를 고수한다는 의미의구교도파 Old Believers, staroobriadtsy’ 이끌던 아바꿈이다.

니꼰은 알렉세이 황제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부 귀속이었던 교회재산을 되찾으면서 각종 전례들을 개혁했다. 이처럼 그는 신앙의 내적인 부분보다는 교회의 권위를 찾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1654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재결합함에 따라 그리스 전례를 따르고 있던 우크라이나 교회를 흡수하기 위해서 러시아 정교회의 예전을 그리스식으로 바꿨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한 아바꿈이 이끌던 구교도파는 17세기 말까지 무려 2만명이신앙의 수호 위해 불속으로 뛰어 들었다. 분신(焚身) 순수한 옛신앙의 표현이라는것이다.

이들외에도 레스콜의 시기에 매우 독특한 종파들이 등장했다. 하나인 다닐 필립뽀프가 주도한 채찍파를 석영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닐 필립뽀프)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면서 사람들에게 모든 세속적인 책과 술과 꿀과 성적인 욕망을 과감하게 끊어 버리라고 호소하였다. 채찍파는 노래를 부르며 원무를 추는 독특한 의식을 통해 출생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했으며, 주신제와도 같은 의식이 절정에 이르면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미친듯이 채찍질을 가했다. (석영중, 123)

이반 셀리바노프가 창시한거세파 활동했다. 거세파는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이름에서 그들이 어떠한 종교적 실천을 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독특한 것은 다닐 필립뽀프도 이반 셀리바노프도 모두 탈영병 출신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19세기까지 이어져 아나키스트적 성향을 인민주의자 시차뽀프는 이들을 반정부 운동에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창시자와 초기 추종자들 탈영병이 많았던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도 이러한 종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악령 무신론자 끼릴로프가 거주하는 하숙집이 채찍파 교주 필립뽀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 폭도들의 무리와 거세파를 결부시켜 설명한 , ‘백치 살인자 로고진이 거세파 가문출신이라는 것등은 모두 종파에 대한 저자의 우려를 반영한다고 있다. (석영중, 125)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속죄와 구원의 시각에서는 이 종파를 우려섞인 눈초리로 보는 것이 당연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답게 이런 류의 종파에 대해 무한 애정을 보냈다.

톨스토이가 불후의 명작부활 것도 탄압받던 두호보르파 (Doukhobors) 캐나다로 피신할 있게끔 이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채찍파 일부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두호보르파는 러시아어로 영혼(spirit) 의미하는 dukh 씨름하는 (wrestler) borets 합성어로성령의 씨름꾼이라는 뜻이다.

18세기 후반에 그룹은 이단과 평화주의를 이유로 짜르와 러시아 정교회의 박해를 받았다. 1785년에 정교회 대주교는 그들을 두호보르 즉 '성령을 대적하여 씨름하는 '라로 불렀으나 이들은 스스로를 '성령의 씨름꾼'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그들을 향한 멸칭을 긍정의 의미로 바꾸어 받아들일 정도로 그들에게는 이름 조차 없었다는 이야기다

승천마을로 불리던 초기 두호보르파 캐나다 거주지
승천마을로 불리던 초기 두호보르파 캐나다 거주지

석영중은 그의 책에서영혼의 전사파라는 종파를 소개하는데 원어를 쓰지 않아 확인할 없지만 두호보르를 그렇게 부른 듯하다. 두호브로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앤드류 돈스코프(Andrew Donskov) 그의 ‘Leo Tolstoy and the Canadian Doukhobors’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구전으로 전승된 가르침과 전통을 가지고 러시아 남부에서 농민 집단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기원은 불분명하다. 그들의 교리는 채찍파의 교리에서 일부분 차용했다. 두호보르는 하나님이 교회가 아니라 인간 안에 거한다고 믿으면서 교회 예배를 거부했다. 그들은 세속 정부를 거부하면서 평화주의를 실천했다. 성서도 부정한 그들 안에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편과 찬송으로 대치했으며, 그것을 살아있는 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예배는 몰레니라고 불리며 소브라니라는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 소금 물을 제외하고 어떤 종교적 상징도 사용하지 않는다. 악기나 악보조차도 사용하지 않는 일종의무악기파

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 안에 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으며 "수고하고 평화로운 " 그들의 추구하는 목표다. (앤드류 돈스코프, 1 축약번역)

 

이들이 톨스토이와 어떤 과정을 통해 함께 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톨스토이가 먼저 이들의 교리를 받아 들였는지, 아니면 이들이 톨스토이의 정신에 심취했는지는 선후관계가 불분명하다. 아무튼 1892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채식주의를 따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열되면서 서로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게다가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성향 때문에 탄압이 심해지자 톨스토이는 대규모 이주를 계획하면서부활 인세로 이주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스의 키프로스 등으로 1차가 떠났으나 따뜻한 기후에 그들은 적응 못했다. 결국 캐나다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1898년부터 1899년까지 모두 4척의 배가 캐나다를 향해 떠났다. 두번 배는 톨스토이의 장남 세르게이가 인솔했다.

처음으로 캐나다에 도착한 사람은 모두 7,427명이었고 1927년까지 꾸준히 이주했다 1950년대 브리티시 콜럼비아 통계에 따르면 이들의 숫자가 12,000명 넘었다. 현재는 4000 정도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 캐나다에 왔지만 공교육과 납세를 거부하는 그들의 신앙은 캐나다에서도 용인되기 어려웠다. 초기 정착 과정에서 그들은 캐나다 정부와 엄청난 마찰의 과정을 겪었다.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있는 그들의 유명한 나체시위도 캐나다 정부와 마찰의 유명한 사례다. 이런 믿음 때문에 그들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톨스토이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톨스토이는 19세기 그들의 교주였을까? 단순한 후원자였을까? 톨스토이의신학 따랐다고 볼만한 여러가지 흔적들이 있다. 단순한 후원자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70 넘은 고령이어서인지 몰라도 캐나다행에 아들을 대신 보냈을 함께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작품을 바친 참여형 문학가였음에는 틀림없다. 러시아 교회를 향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정통 신앙의 입장에서 작품을 전개한 도스토옙스키와 평화주의적 이단과 함께 하면서 다른 형태의 신앙을 지켜나간 톨스토이 모두 러시아를 넘어서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남겨진 소중한 유산이다.

목사들의 설교단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지만 그들 중에 이 두 사람의 사상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더군다나 톨스토이는 한국 목사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단의 '배후'가 아닌가? 두호보르파를 향한 톨스토이의 경외감은 아래 글에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모든 노력은 두호보르파를 무력화하여 그들을 고립시키고 외국으로 추방하는 방식이었으며 지금도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호보르파의 투쟁은 수백만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온화하고 근면한 두호브르파에 대한 박해 덕에 자기 활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은 수백의 늙거나 젊은 군인들이 있다. 두호브르파의 삶과 그들이 당한 박해를 보거나 들음으로써 난생처음 인생과 기독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수백만 사람들을 통치하는 정부 또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음을 감지하고 있다.(중략) 전쟁의 결과가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정부만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에 기초한 정부는 무기로 똑같이 타격받는다. 그리스도는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세상을 이기신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무기의 힘을 믿게 되는 범위에서 그렇다. (톨스토이, 죽이지 마라, 92)

1899년 캐나다에 도착한 두호보르파
1899년 캐나다에 도착한 두호보르파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로 했습니다.
- 석영중, 러시아 정교, 고려대학교 출판부, 2020년
- Andrew Donskov, Leo Tolstoy and the Canadian Doukhobors, 오타와 대학출판부, 2019년
- 레프 니콜라에비치 톨스토이(변춘란 옮김), 죽이지 마라, 바다 출판사,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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