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열매
무서운 열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6.13 03: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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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기사를 읽었다. 박지성은 부모님에게 수십억 원 하는 집을 사드렸고, 임대료 수입이 엄청난 건물도 사드렸다. 자식 때문에 팔자가 폈다고 이야기 하는 바로 그 상황이다.

동자동 쪽방촌 기사도 읽었다. 쥐와 바퀴벌레 때문에 살기가 힘 든다고 했다. 인간적인 삶은 기대하기 힘들다. 건물주들은 고장 난 것을 고쳐달라면 나가라고 한다. 그곳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정부가 주택보조금을 지급하면 그만큼 임대료가 올라간다. 정부의 주택보조금 대부분이 그대로 건물주에게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다. 그래서 건물주들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막대한 현금 수입을 올리는 그곳의 개발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 두 기사를 읽으며 세상의 잔인함을 생각한다. 박지성은 효자이고 악한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세상의 불평등에 크게 기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드린다. 그래서 이번 정부는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 교육부를 폐지하고 무조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이들에게 인간성이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간단하다.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잘 산다는 것인가. 성공한 사람들과 부자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잘 살게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과 부자들은 박지성이나 쪽방촌 건물주들과 같이 될 뿐이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아무리 다양한 것처럼 보여도 그 본질은 같다.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만이 아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이보다 더 정교하게 ‘정글’을 이룬다. 단순히 힘센 자가 아니라 가진 자와 능력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소위 말하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진다. 총합은 제로다. 내가 하나를 더 가지면 누군가 그 하나를 잃어야 한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이겨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수억, 수조가 된다. 인간의 욕망은 채울 수 없는 블랙홀이다.

세상의 이러한 방식을 정의로 인식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체제이다. 누구건 승자가 될 수 있다.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승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힘과 능력이 있는 자가 무조건 이긴다. 돈은 여기서 가장 분명한 힘과 능력의 산물이자 도구이다.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뭘 하고, 이런 글을 쓰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하는 생각은 모두 이런 것들뿐이다. 맞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거나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도대체 세상에서 누가 돈을 미워할 수 있는가. 당장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함은 물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행동 자체를 멈출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돈이 없으면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개인을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러니 각자가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가장으로서 당연하다. 또 그렇게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반드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어제는 축구 국가대표팀의 평가전이 있었다. 다행히 비겼다. 만일 2대0으로 졌더라면 잠을 설쳤을 것이다. 경쟁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무의식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내면의 경쟁심을 강화한다. 삶이 곧 경쟁강화의 일환이다. 깨달음이 있다고 경쟁을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패배다. 나락으로의 몰락이다. 경쟁을 멈추려면 최소한 평생 돈 걱정 안할 정도의 재산을 축적해놓아야 한다. 만약의 위기까지 대비해서 충분히 해두어야 한다. 박지성 부모처럼 살 집이 있고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쪽방촌 사람들처럼 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엄연한 세상의 현실이다.

아무리 용기가 있는 사람도 이런 세상의 현실에 역행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결국 무모하게 도전해보았자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한 개인만 망한다. 내 경우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출발은 좋았다. 아내와 내가 열심히 돈을 벌어 우리는 우리와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갔다. 어떤 분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인생 성공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문제였다.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하나라도 더 가져야 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자살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성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죽을 것을 요구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황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경쟁에서 이겨도 미래가 불확실한데 지라는 것이다. 단순히 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아닌가. 밀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밀알이 죽으면 밀알로서는 실제로 끝이다. 그러나 밀알이 죽어야 밀이 싹 트고 밀알 안에 있던 생명이 드러난다. 어떤 씨에는 밀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나무도 들어있다. 

그런데 이런 도박을 감행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밀알의 입장에서는 무모하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밀알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썩을 때까지 한 알의 밀알로서 존재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을 하며 영생을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시겠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단순히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죽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 죽어도 영생의 유무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살아서 죽음을 택하고 실제로 죽어야 한다. 

내게 세상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실감나게 하기 위함이다. 적대적인 경쟁의 세상 속에서 경쟁을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쪽방촌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드리고 자신도 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기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얼마나 무모해 보이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땅에 떨어져 죽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평화의 나라가 임한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 그 어떤 결핍도 없는 샬롬의 세상이 적자생존의 정글(세상) 한 가운데 세워진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산 위의 동네’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통일을 이룬다.

아!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며 어리석은 주장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 방식이며 내가 향해 가고 있는 곳이다. 나와 같은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찬양이나 부르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성체를 받았다고[도대체 왜 성혈은 받아 마시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

내 말이 과격하게 들릴 것이다. 독불장군의 자기 주장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 구원은 당연히 없다. 한 알의 밀알로서 썩을 것인가. 땅에 떨어져 죽을 것인가. 선택은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정말 무서운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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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gini 2022-12-06 18:42:14
저는 썩기가 두려운 밀알인데요.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제 머리속에 가득 차 있기만 한 의문과 두려움과 부담들이 이 글에 다 일갈되어 있어서 한대 맞은 느낌으로 댓글을 남깁니다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