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하얼빈- 이토를 왜 쏘았는지가 없다
김훈의 하얼빈- 이토를 왜 쏘았는지가 없다
  • 김기대
  • 승인 2022.09.20 12: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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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과 무엇이 다른지 김훈은 대답해야

한국에도 독자층이 두터운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 그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천황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식민지의 압박받는 민중들에게는 연민을 갖기도 했지만 유독 한국과 중국에 편견이 심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쓰메는 1909 9 2일부터 10 14일까지 만주를 여행하고 아사히 신문에 여행기를 게재했다. 그가 여행기를 게재하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1909 10 26)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나쓰메는 한국과 만주의 여행기인한만소감(韓滿所感)-'에서 이렇게 쓴다.

어젯밤 오래간만에 잠시 짬을 내어 '만주일일신문' 무언가 소식을 쓰려고 생각하여 붓을 들어 서너 행을 쓰려고 하던 차에 이토 공이 저격당했다는 호외가 들려왔다. 하얼빈은 내가 얼마 전에 둘러봤던 곳으로, 이토 공이 저격당했다고 하는 플랫폼은 지금부터 1개월 전에 내가 발로 디뎠던 곳이었기 때문에, 드문 변고였기도 했지만, 장소로부터 연상되는 자극에 충격을 받았다.

 

나쓰메의 글에 안중근 이야기는 이상 없다. 그가 한국에 가진 생각은 다음과 같았던 터라 안중근의 거사를 '반전주의자'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인력거를 끄는 방법이 너무나도 형편없어서, 단지 무턱대고 뛰어대기만 하면 인력거꾼의 본분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 완전히 조선식이었다.('만주와 한국여행기', 소명출판)

 

동시에 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눈앞에 두고 승자의 패기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나의 동포들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의 총아라고 말하지 않을 없다. (한만소감 하, '암살'에서 재인용, 소명출판)

 

암살 2010 광주민중항쟁 30주년 국제 심포지움에 초청될 정도의 지한파 작가인 구로카와 소의 소설 제목이다. ’암살 어떤 가상의 인물이 러시아의 대학에서도스토옙스키와 대역사건 (大逆事件)’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작가는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을 비교하면서 안중근과 이토,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구로카와 소는 이토 역시 젊은 시절 정적을 암살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암살당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토 주장한평화 일본의 진보적인 작가에게도 매력적인 부분이다. 평화주의자의 묘한 교집합, 암살자라는 사실위에 사람 모두를 동등한 인물로 대접하고 있다.

 

하얼빈에서의 사건 당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저격당해 절명하는 찰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듣고는 '바보같은 녀석이다'라는 말을 흘렸다고 하는 전설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누구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야기인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렇지만 그때 만일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면, 이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쇠퇴한 한국을 이제 와서 독립이라는 정론만으 어떻게 되세운다는 것인가?

라고 범인에게 되묻고 싶은 기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에게 이상 그만큼의 시간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사람의 발언은 비록 오래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역시나 도망자가 되어 몸을 의탁할 없을 때의 심정을 서로 알고 있는 자들로서의 공통점이 느껴집니다. 이토는 눈앞에 있는 젊은 남자가 자신을 습격했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유를 추측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암살')

 

일본작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게다가 안중근도 한때 이토의평화 심취되었을 만큼 이토의 사상이 흡인력이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훌륭한이토를 묘사한 구로카와 소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김훈의하얼빈’(문학동네, 2022)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수십년 동안 생각해 왔다던 안중근과 일본을 오가며 수집한 자료가 어디 있는지 찾아 보기 힘들 만큼 책의 내용이 빈약하다. 물론 전기 문학이 아닌 이상 안중근의 세세한 사료들을 소설에 모두 담아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김훈은하얼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소설의 제목이 안중근이 아니고하얼빈이듯이 하얼빈역으로 수렴되는 어떤 거스를 없는 역사의 격랑, 안중근과 이토와 안중근 아내 김아려가 모두 하얼빈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격랑을 묘사하는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런 종류의 소재 처리는 김훈 소설에서 충분히 기시적이다.

안중근과 김훈 모두 가톨릭 신앙인이기에 어떤 운명(섭리)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명쾌하지 않다. 안중근이 다니던 청계동 성당의 빌렘 신부의 마지막 기도가 불쾌하다.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하얼빈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 

구로카와 소에게는 이토가 숨을 거두면서젊은 남자가 자신을 습격했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유를 추측할  통 큰 사람이지만 김훈에게 안중근은 평안이 필요한 망자일 뿐이다. 안중근에게 신앙은 그의 거사를 추동하는 힘이 아니라 거사 후 위로의 역할로서만 존재한다. 김훈의 신앙관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대목이다. 

신앙 언어를 폄훼하는게 아니다. 차라리 김훈은 점을 더욱 강조해야 했다. 비겁하게 빌렘 신부의 입을 빌어서 가톨릭 신앙을 언급할 안중근의 신앙 고백은 매우 절제된다.

히틀러 시절 20대의 젊은이들이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던 '백장미단'사건, 그들은 네 번째 전단지에서 이렇게 쓴다.

 

히틀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거짓이다. 그가 평화를 말할 때 그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말할 때, 그것은 악마, 추악한 천사, 사탄의 힘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입은 지옥의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창고이며, 그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저주 받았다. 

 

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신앙적이고 아름다운 20대의 외침인가!  반면 김훈은 안중근의 입에서 뭔가 나올듯이 변죽만 울리다가 슬쩍 빌렘 신부의 언어로 바꾸어 버린다. 다양한 독자층을 고려해 안중근과 신앙을 분리시켜 대중 소설로 읽히기를 바라는 김훈의꼼수 보인다.  그러면 처음부터 종교 부분은 빼든지.  

이토 암살에 커다란 역할을 블라디보스톡의 한글신문 '대동공보 그곳에 모여서 거사를 논의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안중근과 의형제라고까지 불리던(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권' 참조 ) '대동공보'의 이강 기자는하얼빈에서 지식인체 하는 인물로 나온다. 안중근이 이토 저격에 지식인이 아니라 담배 장수 우덕순을 동지로 삼은 점을 강조하는 김훈의 속내는 평소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비판적이던 김훈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안중근의 재판 기록을 보면 대동공보사를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을 안중근이 심하게 비난한 것은 사실이다. 김훈도 이강의 평가를 그런 기록에서 빌어 왔을 것이다. 이는 안중근의 진심이 아니라 그들을 폄하함으로써 재판에 엮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안중근의 재판 기록과 거사 과정의 논의는 박환, '러시아 한인 독립전쟁', 선인에 상세히 나온다)

다시말해 김훈은 역사와 섭리를 강조하면서 민중의 연대 과정을 도외시한다. 차라리 이문열의 영웅사관이 솔직해 보인다. 영웅사관이라 오해받을 지점 가서 김훈이 한번씩 끼워 넣은 민중 서사는 '대동공보'는 외면하고 우덕순만 동지로 삼은 내용처럼 매끄럽지 못하다.

안중근은 이토를 쏘았을까? 김훈은 안중근이 포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토를 금수로 취급한다. 안타깝게 소설 어디서도 이토가 총에 맞아 마땅한 금수로 그려지는 부분은 없다. 금수가 아니라 적어도하얼빈 이토는 문화인이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이토의 평화론이 가진 위선성을 비판한다. 안중근의 재판 기록을 아는 독자들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김훈은 오히려 건조하게 더 축소시켜 버린다. 이 정도가 암살 이유라면 '하얼빈' 속 이토의 인간성으로 미루어 볼 때 둘이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긴박감이 떨어진다. 김훈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안중근과 이토의 평화를 차별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특히 소설의 비교적 부분에 나오는 다음 단락은 도대체 썼는지가 불분명하다.

 

-위생에 관한 명령이다. 서울 도성 거리에서 방분 방뇨를 금하라. 아동들도 포함시켜라. 집안의 분뇨를 길에 버리지 못하게 하라. 분뇨는 반드시 수거해서 처리장에 버리도록 행정을 조직해서 시행하라. 걸인과 부랑자들의 문전걸식을 금한다. 이들을 도성 밖에 수용하라. 훈령으로 알리고, 병력으로 단속하라. 같은 명령이 반복되면 권위가 훼손되어서 시행하기 어려워 진다. 분뇨의 문제는 거듭 말하지 않겠다. 이번에 엄단해서 통감의 뜻을 보여라.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덩이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이 배어 있었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마시다가 기생들한테서 들었다.

이토가 이 이야기를 조선 대신에게 말하자 조선 대신들은통감각하의 살피심이 이처럼 세밀하시니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이게 뭔가? 실재했던 이토의 공문서인지(김훈은 책 뒤에 참고한 자료들을 소개하는데 이토의 문서에 대한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작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창작인지는 모르겠으나 단락이 있어야 이유가 없다. 구한말에 그렇게 더럽지 않았다고 강변하려는게 아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영화화한향수 파리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향수 더러운 파리 골목과 거기서 시작된 최고의 향수를 대비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아가씨 원작 세라 워터스의 소설핑거스미스 19세기 런던도 엄청 더러웠다. 소설에서 세라 워터스는 더러운 곳에서 더러운 삶을 살던 밑바닥 인생들이 귀족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런데 김훈의 '더러움'은 뜬금없다. 백장미단이 전단지에 쓴 히틀러입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는 김훈의 글에서 난데 없이 구한말 한성의 역겨운 냄새로 둔갑한다. 이런 논리는  걸음 나가면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 시켜주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어지고 나가면 먹고 살기 위해서 스스로 종군 위안부가 되었다는 논리 또는 강제 징용이 아니라 취업이었다는 논리가 힘을 얻게 된다.

기존의 작픔에서도 드러났던 그의 세계관을 지지하기 위해 안중근을 소환한 '하얼빈'이  그래서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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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박 2022-12-06 06:53:48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서치하던 중 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귀한 글이라 생각되어 글 남깁니다. 일단 저는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여 그분의 책을 여러권 읽었습니다.
이번 하얼빈은 일단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 안중근의 고뇌와 이토의 퍙화론과 안중근의 평화론을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분양이 적었습니다. 읽다보면 어느새 끝나버린 (이게 단순히 재밌어서 빨리 읽어버린게 아닌).
그리고 말씀하신 한양의 똥 처리 방법은 제가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고 이거 자칫하면 식민지근대화론 아닌가 싶었는데 짚어주셔서 짚어주셔서 넘 좋았습니다.
그래도 하얼빈 읽고 모쪼록 독립운동과 함께 여러 생각할 수 있어 좋기는 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