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이 노무현과 김용옥을 비판했던 이유
김성동이 노무현과 김용옥을 비판했던 이유
  • 김기대
  • 승인 2022.09.2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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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을 추모하며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이 지난 25 지병인 위암으로 별세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별세하기에 다소 이른 나이인 75, 오랜만에 들려온 그의 이름은 부고를 통해서였다. 부고는 생전 행적을 기념하고 칭송하는 형태로 쓰여져야 하는데 글은 칭송과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쓰여졌다. 그의 부친 김봉한(金鳳漢) 남로당 당원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과 경찰에 의해 다른 사상범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앳되보이는 소년이 팔이 뒤로 묶인채 삶을 간절히 탄원하던 유명한 사진의 현장, 1950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이루어진 학살에서 김봉한도 학살당했던 것이다. 김성동이 47년생이니 한국 전쟁까지 햇수로 4, 김성동의 기억 속에 아버지가 남아 있을 자리는 없다.

 

김봉균은 해방되던 8 18 훗날 남부군 사령관이 이현상과 함께 김해균의 집을 찾아 앞으로의 시국에 대해서 논의했다. 김해균은 전라북도 대지주의 아들로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 보성전문의 영문학교수로 있으면서 그의 재산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위해 썼다. 마르크스를 만든 프리디리히 엥겔스라고나 할까? 김해균의 명륜동 집은 박헌영의 주요 아지트였다.

근거가 불투명한 김성동의 추정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박헌영 이현상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다. 경성 콤그룹은 일제 강점기부터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을 해온 공산당 그룹이었다. 김성동은 공산주의자 아버지를 끊어내기 보다는 민족과 계급을 고민하다가 역사 속에서 희생된 인물로 여겼다.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부친 한국전쟁에서 좌익으로 사망), ‘마당 깊은 집’의 김원일(부친 한국전쟁 월북),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이문열(부친 한국전쟁 월북) 등과 함께 김성동은 아버지가 좌익계열인 작가군에 속하지만 이들과 김성동은 많이 다르다. 특히 월북한 아버지와 글에서 조차 끝내 화해하지 못한 이문열과 시대를 고민하던 지식인 아버지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김성동은 극과 극이다.

학교를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가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진학(2학년때 자퇴)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이문열과 고교 중퇴후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던 김성동의 행적도 비교된다. 김성동은 법명 정각(正覺)으로 수행 중이던 29살에 소설 ‘목탁조’로 등단했다가 내용을 문제 삼은 불교계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했다. 1978 역시 불교를 소재로 삼은 ‘만다라’로 한국 문학 신인상에 당선됐고 만다라는 베스트 셀러를 기록한다. 뒤이어 1981 임권택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된 만다라도 흥행에 성공했다.

 

2008년에는 개봉된지 27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CNN 뽑은 아시아 최고의 영화 18편에 포함됐다. 여기 포함된 다른 한국 영화는 봉준호의 괴물(2006)뿐이었다.

만다라는 Mandala라는 불교 미술의 형태이지만 일부 불교에서는 수행을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종처럼 생긴 물건을 만다라로 사용한다. 소설 만다라에서 만다라는 무엇이었을까? 지산과 법운, 승려에게 화려한 불화(佛畵)로서 만다라는 세속 세계였다. 엉터리 승려같은 지산에게 영향을 받은 법운은 세속세계와 수행 사이에 고민하다가 기차역에서 절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고 세속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자신의 해탈은 고요한 절간이 아니라 세속의 장삼이사들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만다라의 개정판을 읽지 못했지만 개정판에서 법운은 다시 절을 향하는 것으로 개작되었다고 한다. 아쉬운 개작이다.

‘만다라’ 이후 김성동은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지만 만다라처럼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없었기에 그는 내가 좋아하던 작가 중의 명으로만 남았다. 그러다가 역사 에세이인 ‘염불처럼 서러워서’를 통해 김성동을 다시 만났다.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2014년이고 내가 구입한 것은 5 뒤인데 때도 초판이었다. 뜸하게 활동할 때이지만 김성동의 이름에 기대어 3000 정도('작은 숲'이라는 작은 출판사가 10000부를 찍을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찍었을 텐데 5년동안 3000부가 나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저물어가는 그의 시대가 염불처럼 서러웠다. 

‘염불처럼 서러워서’는 궁예, 신돈, 김개남 역사 인물들을 다룬 에세이다. 여기서 김성동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전봉준의 작품이 아니라 김개남의 작품이라는 세간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책의 머리말에서 김성동은 자기 집안을 이렇게 소개한다.

 

삼절오강이여. (중략) 삼절(三節) 나라의 안녕과 인민대중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외적과 맞서다 대나무가 쪼개지듯 쪼개져 버린 선원(仙元, 고구려때 벼슬)할아버지와, 경술국치 자진(自盡)으로 왜제에 앙버틴(끝까지 대항하여 버티다) 증조 할아버지와, 왜제와 해방공간에서 항왜 항미 투쟁을 벌이다 꺾여진 아버지를 말하고, 오장(五長) 모두가 똑고르게 행복한 삶을 살자던 인민의 나라에서 이지가지(다양하고 많은 종류) 위원장을 맡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삼촌 그리고 민족문학 작가회의에서 소설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중생을 말한다.

 

말은 문민정부(김영삼 정부) 민주화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왔다. 이문열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반공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그릇된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김성동도 반대편에서 가문 내력에 사로잡혀 민주화 인사들의 무용담을 하찮게 여기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민주화 인사들의 행동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김성동도 민족문학 작가회의 소설 분과위원장 말고는 딱히 민주화에 기여한바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고구려 시절 벼슬까지 소환했을까?

정통 유교 집안이면서도 반골이어서 겪은 불이익과 가난, 연좌제로 인한 모욕이 10 후반의 그를 절로 이끌었지만  그도 기억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 극과 극은 통한다던가? 아버지로 인한 기억의 중압감 있어서는 그는 이문열과 ‘도긴개긴’이다.

‘염불처럼 서러워서’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범무서운 모르는 하릅강아지’ (하루 강아지가 아니라 하릅 강아지다. 하루는 1일을 의미하지만 하릅은 살을 의미한다)에서 노무현 전대통령과 도올 김용옥을 비판한다. 비판의 시작은 사람의 만남을 비판했던 진태하 인하대 석좌교수의 글로부터 시작한다.

취임후 노무현과 도올이 만난 자리에서 도올은 자신이 붓글씨 ‘노무현’을 전달하는데 그것은 노무현(盧武鉉) 아니라 여무현(慮武鉉)이었다. 도올은 광기에 사로잡힌 학자고 노대통령도 황당함이 유유상종이라는 진태하의 글을 퍼온 김성동은 동조한다.

유교집안이지만 새로운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김성동이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입장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할아버지 덕분에 한학에 능통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발굴해내는 데도 앞장선 그의 행보와도 삐걱거린다. 노무현과 김용옥(그가 비록 동양철학자이기는 하지만) 한자에 익숙한 세대가 아닌데 그렇게 비난하는 데서 김성동의 묘한 ‘선민의식’이 느껴진다.

게다가 성씨 노는 당연히 盧로 써야하지만 네이버 옥편에 따르면 () 노로 읽히기도 한다. 도올은 잘못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여무현으로 쓰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진태하와 김성동이 () 노로 읽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김성동은 사람의 가벼운 입도 비판한다. 노무현과 김용옥 사람 모두 설화(舌禍)로는 몫했지만 노무현의 설화에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장인의 전력 때문에 정신(치)적 연좌제로 고생했던 노무현을 보면서 김성동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했다.

김성동이 만나고 싶어 했던 마지막 여성 빨치산 정순덕 ‘장군’(김성동은 그를 장군이라 호칭한다) 먼저 산에 들어간 남편의 피살 소식을 듣고 17살에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인물이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정순덕은 한학에 능했을까? 그의 말은 고상했을까? 그래도 김성동은 정순덕에 대한 존경을 놓지 않는다. 김성동이 만약 배운 사람과 지도자는 정순덕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그건 계급투쟁이 결과다.

이제 새로운 삶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이승만, 독립군과 빨갱이 사냥을 박정희, 권력을 위해 백성을 학살한 전두환만 빼고 모두 화해하시라! 당신이 계신 세상으로 곧 갈지도 모를 사람 그와도 화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무엇보다도 안식의 공간에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라 쓰고 나는 속박이라 읽는다) 내려 놓으시고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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