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하던 물집 아저씨 김동길은 왜?
온화하던 물집 아저씨 김동길은 왜?
  • 김기대
  • 승인 2022.10.05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고) 선생님, 가시는 길에 평안을 빌어야 하지만 주저되는거 이해하시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결혼전까지 살던 동네는 한국 태고종 봉원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서울에서 보기드문 일종의 사하촌(寺下村)이었다. 김정한의 소설사하촌 나오는 그런 악덕 절은 아니고 봉원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늑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봉원사 인접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에는 주로 연세대, 이화여대 관계자들, 기독교 지식인들이 살았지만 종교간의 갈등은 전혀 없었다. 연세대 신학과에서 가르치던 문상희 유동식, 도올 김용옥과 그의 형제들(김용준, 김숙희),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였던 불트만 전문가 허혁, 기독교 교육학의 손승희(박근혜 정부에서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을 했고 청문회 통해 유명해진 여명숙의 어머니), 한국 1세대 독문학자 연세대 정경석(통일활동가 신은미의 시아버지), 연세대 영문학 교수 오화섭(작가 오혜령과 진보정당활동가로 연대 상대 교수를 지낸 오세철의 아버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바이올리니스트 정희석(그는 서태지의 작은 할아버지로 유명해졌다), 성악가 이규도, 100 수필가 김형석도 동네 주민이었다.

요즘같으면 교회가 너개는 있어야 동네 규모이지만 60 이상된 통합측의 봉원교회와 감리교 대신교회만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 봉원교회는 창립 목사가 봉원사에 찾아가 교회를 짓게 땅을 달라고 해서 절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지은 특이한 교회다. 

동네에 초등학교가 없어 학교를 가려면 많이 걸어야 했다. 네이버지도에 의하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사이의 거리가 2.6km. 산골에서 학교를 다닌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닌 거리겠지만 도시 생활에 익숙한 초등학생의 종종 걸음으로 왕복 5.2km 짧지 않은 거리였다. 등교길에야 시간을 맞춰야 하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갔지만 하교길에는 중간 쯤에 쉬어야 했다.

동네 아이들은물집이라고 부르던 집에서 쉬어 가곤 했다. 오래 전이지만 서울이었던지라 모두 대문을 잠글 , 넓은 마당의물집 동쪽과 남쪽으로 두개의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들은 물맛 좋기로 소문난 그집의 펌프에서 나오는 물로 목을 축이고 등목을 하고 서로 물을 튀기며 놀다가 피곤하면 작은 정자 같은 곳에서 깜박 잠이 들기도 했다. 물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동네주민들도 양동이를 들고와 물을 퍼갔다. 신기했다. 갑자기 귀신이 나올 같은 그런 집도 아닌데 누구도 나와서 어린이들의 소란을, 어른들의 물퍼감을 나무라지 않았다. 집은 항상 단정히 정리되어 있고 창문넘어 보이는 실내에는 책이 그득했다.

 

어느날 주인인듯한 아저씨가 나왔다. 처음 마주친 아저씨가 혹시 우리를 꾸중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는 놀다 가라며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물집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과 김동길 교수 남매가 함께 살던 집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던 봉원교회에서 자주 설교를 했는데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시국 비판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예언자의 소리였다. 청년들이 예배후에 교회 뒷골목에서 흡연을 하다 설교를 끝내고 돌아가던 김교수와 마주쳐 화들짝 손을 뒤로 하면 괜찮다고 웃어주던 그였다.

그는 1974 학생운동의 배후라는 조작으로 구속되면서 신학과 김찬국 교수와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1979 10.26이후 잠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에 의해 다시 해직, 1984 6 복직했다.

그는 시기에 별다른 민주화 운동은 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서 칼럼 정도만 쓰고 있었는데 그의 글에 민주화 운동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는 평안도 서북출신이다. 다행히 악명높은 서북청년단 활동은 하지 않았다. 누이 김옥길이 먼저 서울에 와서 이화여전(미국 유학에서는 감리교 대학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다녔다) 다닌 영향을 받아 감리교 친화적이었던 것이 장로교인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단과 거리를 두게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북출신 특유의 반공의식 때문에 5.18 광주에 진짜로 북한군이 왔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사이에 민주화 인사 누구도 그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거나 모시려는 시도를 해서 섭섭했었나?

 

84 복직후에 그의 강의에는 연세대의 가장 공간인 대강당을 채울만큼 수강생으로 넘쳐 났다. 경험도 그에게 어떤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게다가 80년대의 학내 분위기는 거의 전투분위기였으니 그의 강의도 휴강하기가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학생 운동과 그 희생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5 김대중 김영삼의 힘을 합친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에서 바람을 일으켜 제 1야당이 되었지만 그해 5 김동길은 갑자기 정치는 40대에게 넘겨주고 김대중 김영삼에게 퇴진해서 낚시나 다니라는 칼럼으로 민주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쉬임없는 학생운동과 양김의 활동으로 그나마 전두환 정권을 몰아낼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낚시론 그를 향한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김동길이 40대 정치인을 거론했을 때는 분명 누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당시 40대에서 돋보이는 정치인은 정대철, 이종찬, 박찬종 뿐이었다. 혹시 김동길은 정대철을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을까? 정대철의 아버지 정일형은 민주당 계열에서 오래 활동한 외무부 장관을 지낸 국회의원이고 김동길과 같은 평안도 출신의 감리교인이라는 배경 때문에 그랬나?

어머니 이태영변호사는 한국 여성운동의 기초를 놓은 평안도 출신의 엘리트 여성에 감리교인이면서 그의 누이 김옥길 총장과도 가까웠다.

근거없는 추정이지만 김동길의 40대론이 너무 난데없었기 때문에 이런 추정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어릴 동네에서 김동길 김옥길의 집과 정일형 이태영의 집은 걸어서 10분거리여서 교류가 잦았을 것이다.

낚시론이후로 김동길의 성향은 점차 우경화되기 시작해 그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모두 낙선한다는 조롱의 주인공이 되었고 말년에는 거의 극우 유튜버나 있는 말을 쏟아내다가 한국시간으로 4 노환으로 별세했다. 만년(晩年)의 그의 행적은 여기에 담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듯 해서 생략했다.

선생님, 그리운 물맛과 온화한 모습으로 저에게 오랫동안 남으셨어야 했는데 만년에 그런 길을 가셨는지요? 부고 기사를 쓰면서 선생님의 중에 좋은 말이라도 소개하려고 했는데 죄송하게도 전에 제가 가진 책중에 김지하 김진홍의 책과 선생님의 책을 함께 버리면서 모두 없어졌더군요.

평안을 빌기가 주저되지만 그래도 때나마 존경했던 분이라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모든 갈등, 자존심, 선생님이 결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나쁜 기억만 남긴 부친에 대한 원망 잊으시고 부디 지역구분이 없는 원초적 고향인 그곳에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