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진보의 가장 큰 위험은 '그리스도교'
인류 진보의 가장 큰 위험은 '그리스도교'
  • 최태선
  • 승인 2022.10.08 0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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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길에서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내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쓰는 글은 정도가 지나치게 보이거나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의문이 들게 만들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주님의 은총으로 나는 가난을 사모하게 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아니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의 나도 가난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가난을 감사하고 더 극한 가난을 사모한다. 이유는 하나다.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것은 극한 가난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사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는 이 고백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선으로 삼으실 수 있는 능력에는 그 어떤 제한도 없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이자 확신이 된다.

얼마 전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가 파킨슨 병 진단을 받았다. 아내는 친구에게 뭐라고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만일 내가 파킨슨 병 진단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내가 아내나 아이들에게 질 수 없는 짐이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내 생각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끝까지 잘 살아야 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고, 마침내 내 힘으로 숨을 들이마실 수가 없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런 내 생각을 새겨놓았다.

나를 이런 생각에 이르게 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블룸하르트이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좌)와 에버하르트 아놀드(우)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좌)와 에버하르트 아놀드(우)

블룸하르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브루터호프 공동체의 창시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글을 통해서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의 수많은 독일 청년들처럼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그의 아내 에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사회 문제에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교회에 환멸을 느꼈다. 나는 그가 느꼈던 이 환멸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아놀드는 독일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그 아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16세기 재침례교도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아놀드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 사람들은 내게도 그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여기에 발데시안과 얀 후스의 후예들이 더해졌고, 후터라이트와 퀘이커 등이 더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아놀드가 당시 느꼈던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에버하르트는 진지하게 해답을 찾던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탐구의 여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자주 모였고, 나는 성경공부와 대화를 통해 그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것으로 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여,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더 깊은 관점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필요, 물질적·사회적 필요,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굴욕과 착취와 노예상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맘몬과 불화(不和)와 증오와 폭력의 엄청난 세력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힘없는 자의 목을 짓누르는 압제자의 잔인한 구둣발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내 말을 다소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놀드가 깨닫게 된 이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성경공부와 대화를 통해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노력보다 더 깊은 관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에 해답을 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블룸하르트였다.

블룸하르트는 인류 진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확신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한 실제적인 일 대신에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이며 피안적인 종교성만을 부추기는 의식과 종교행위로 가득한 일요일 종교를 말한다. 그는 예배 형식과 자기 구원, 내세에만 집중하여 삶의 진정한 변화와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도외시하는 허울뿐인 그리스도교를 한탄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말이다. 블룸하르트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인류 진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블룸하르트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일요일 종교가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삶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알지 못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허울뿐인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오늘날 '교회'이다

블룸하르트는 예수님이 전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라고 믿었다. 블룸하르트에게 있어서 복음은 인간 삶에 혁명을 요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교나 다른 어떤 종교 제도나 인간적인 진보사상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고 쓰는 것들은 블룸하르트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내가 독불장군처럼 여겨지거나 교회의 방해꾼처럼 보이거나 기껏해야 예언자 소리를 듣는 것은 블룸하르트가 보았던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되는 대로 그것을 알게 해주는 블룸하르트를 소개하곤 한다. 그의 중심은 물론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나는 내 소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단언하지만 없다. 결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사실을 에둘러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에 예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블룸하르트가 인류 진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말한 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다.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하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결코 이 사실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인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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