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와 그리스도교
박해와 그리스도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10.21 23: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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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공산당을 혐오한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신앙의 자유가 없어지면 그리스도교가 없어진다는 사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정말 공산주의가 되면 그리스도교가 사라질까.

나는 그런 인식을 지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에서의 그리스도인 이야기를 하곤 한다. 로마의 박해는 오늘날 공산주의나 이슬람권에서 일어나는 박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죽이는 방법은 물론 죽인 후의 처리방식까지 그것은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한 예로, 여자 그리스도인들을 죽인 후에 완전히 발가벗긴 후에 한 다리만을 묶어 매달았다.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이 얼마나 잔인한 처사인가.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멸망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라면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는 멸절되어 사라졌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번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인구의 10% 정도가 되었다. 1%도 안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의 상황 속에서 그렇게 급성장한 한 것이다. 도시의 경우는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로마의 관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상당했다.

박해는 그리스도교를 멸절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를 멸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변질된 그리스도교의 허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을 당시의 로마 제국은 3세기의 위기라는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 헤매던 시기였다. 규모와 세력, 체제 측면에서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게르만족과, 파르티아보다 강력한 국력을 구축하고 동방 일대의 안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사산조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외부의 위협 및 날로 더해지던 재정난 그리고 빈번한 내전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문제가 이미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져 있던 것이 3세기 당시의 로마 제국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군대는 로마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로마는 강력한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제국이었다. 그런데 더 많은 군대가 필요한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징집을 거부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숨지 않았다. 그들은 체포되어 기꺼이 순교의 대열에 참여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다 죽이지 못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먼저 죽었다.

그를 뒤 이은 황제가 발레리우스다. 그런데 발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되었다. 박해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303년 2월,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했고 그것은 309년까지 지속되었다. 로마는 성물과 교회를 파괴하고 그리스도교의 모임을 불허했다. 저항이 있을 경우 강력한 군사대응을 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리스도인에 대해 법적 고발 없이 고문할 수 있게 했다.

발레리우스의 이런 박해에도 그리스도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수가 증가했다. ‘신앙의 자유(312 밀라노칙령)’는 이런 그리스도교를 보고 콘스탄티누스에게 일어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박해에도 그 수가 줄지 않는 그리스도교를 보고 그는 그리스도교처럼 강력한 로마를 상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군인들의 방패에 새기고 최후의 격전지였던 밀비우스 다리 싸움에서 정적이었던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했다. 두 배가 넘는 병력을 무찌른 쾌거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로마의 다신교를 지지했고 그 자신은 특히 태양교에 심취했다. 그가 가장 숭배하는 것은 ‘불패의 태양신’이라는 유일신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를 세례를 받은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로마였다. 로마에게 즉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가 그의 관심사였다.

그가 황제가 되기 전 50년은 유래가 없는 로마의 혼란한 시기였다. 50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로마의 권력은 잠시라도 방심하면 죽임을 당하는 일종의 독배였다. 그것을 아는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도 아닌 그가 그리스도인처럼 순교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내린 조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가의 하부구조로 만들었고 박해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던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교가 되었고, 순교는 전광훈류의 사람들의 입에서나 오르내리는 조롱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폭력 저항으로 세상의 강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여성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결혼을 거부한 것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권력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결혼의 거부는 단순히 성적인 순결이나 종말론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상의 질서에 대한 거부였고, 세상이 요구하는 순응에 대한 거부였다. 물론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나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결혼 거부는 남성 그리스도인들의 병역 거부와 똑같은 폭력과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한다.

고난은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이다. 내가 가난해진 후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났다. 심지어 내 친형제와 자매들도 그랬다.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떠난 것이다. 진리의 경우는 이것이 더욱 현저하다. 진리는 오직 시험을 통해 강화되고 그 진위가 판가름 난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생명의 종교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모자 벗기기 동화에서 보듯이 모자를 벗긴 것은 강력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교를 변질시킨 것도 태양교의 주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태양절의 주일이 그리스도교의 주일이 된 것은 단순한 안식일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주일의 변화였다. 신앙의 자유는 그렇게 그리스도교를 잠식하고 그리스도교를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닌 그리스도교로 변질시켰다.

이제 세상이 변했다. 세상은 생존의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곳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 기후 위기는 물론 양극화와 고물가와 인플레이션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돈이 주인 노릇하는 것은 로마의 군대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다시 진리의 종교로 거듭 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박해보다 더 절대적으로 보이는 맘몬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그리스도교가 진리와 생명의 종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시대가 왔다.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결혼과 병역을 거부한 것처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맘몬(돈)을 거부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사실 박해 중에 가장 지독한 박해는 돈의 박해이다. 또 이 박해가 무서운 것은 이 박해를 박해라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이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맘몬의 박해를 뚫고 하나님 나라에 매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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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2022-11-02 04:11:54
삼가 주의하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