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과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고
내 판단과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고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11.03 0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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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죽었다. 많이 죽었다.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죽었다.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늘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눈물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파하는 모습이 너무 절절해서 가슴이 찢어진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 앞에 서면 가장 먼저 판단을 한다. 그리고 죽음의 이유를 말하거나 죽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순간적으로 내게 떠올랐던 판단과 평가를 얼른 지운다. 그러는 내가 바로 가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가인은 에덴을 떠난 후 城(성)을 지었다. 그 성의 이름이 에녹이다.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도 에녹이라 지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는 신앙심이 깊어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한 인물이다. 에녹이란 ‘하나님께 봉헌된 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사용하는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종(노예)으로 규정한다. 물론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그런 주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주인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두 주인은 하나님과 돈이다.

돈을 주인으로 선택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주인이 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이 아니다. 돈은 결코 자신의 주인 됨을 드러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돈의 종이 된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전히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거나 자기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인 역시 그랬다. 그는 에덴을 떠났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알았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성도, 자신이 낳은 아들도 에녹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그런 가인의 행위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주민이 되었다. 그 의미가 바로 가인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가인 스스로 자신이 지은 성과 자신이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 봉헌된 것(자)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제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며 살아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다. 미국만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인 ‘me generation'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사람들은 물의를 빚은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이단이란 판정을 받은 목사들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가인처럼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물론 그런 현상을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니켈 마인스에서 일어났던 아미시 학교의 총기사건을 기억한다. 아미시 마을에 있는 학교에 각종 총으로 무장한 범인이 아이들 열 명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의 진입이 눈앞에 다가오자 범인은 총을 난사해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에게도 총을 쏘아 자살을 했다. 아미시 사람들에게 범인은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미시 사람들은 그런 범인의 가족들을 찾아 위로했고 범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답지했던 성금을 범인의 가족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런 아미시 사람들을 보고 범인의 가족들은 그들을 ‘검은 옷을 입은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아미시 사람들은 어떻게 범인의 가족들을 위로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범인의 장례식에도 참여하고 성금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미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랐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들의 주인은 자기 자신(가인의 후예)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겐 판단이나 생각 자체가 없었을까. 범인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죽은 범인을 미워할 수 없다면 살아 있는 그들의 가족이라도 미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기억하는 충성스러운 종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원수 사랑을 하지 못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셔야 했다. 아미시 사람들 역시 그런 고뇌의 시간을 지나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틀림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를 고발하고 불의를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주인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분명 그들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고, 그들의 고발 역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이 바로 가인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해야 하는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먼저 내 판단과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울고 있는 유족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트라우마에 시달릴 사람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서 이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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